조선어

[청취자의 벗] 2020년 8월 13일 방송듣기

criPublished: 2020-08-15 18: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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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중에 변호인은 짙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검은 구두를 신었으며 옆구리에 검은 가방을 끼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거의 양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며 이로 하여 그들의 복색은 법정 내외에서 더구나 유표하게 눈에 띄고 있었다.

특별군사법정의판결서는주은래(周恩來)총리가직접관리했다고권덕원이말한다.주은래총리는판결서를일개사법문건이라기보다외교문서수준의높은요구를하고있었다.

"문장부호 하나라도 틀린 게 있으면 국제적인 망신을 하는 거라고 말씀했지요."

그래서 특별군사법정의 판결서는 60년 후에도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권덕원은 인터뷰 도중에 여러 번 강조하고 있었다.

증인석에나선대청국(大淸國)의마지막황제는잊을수없는모습으로권덕원의기억에남고있었다.

"저는중화인민공화국의최대의한간(漢奸)인애신각라부의(愛新覺羅․溥儀)입니다."

부의가 증인석에 나서 한 첫마디의 말이었다. 1956년 7월 2일, 부의는 심양 특별군사법정에 처음으로 전범과 증인 2중 신분으로 등장했다

바람에날려갈듯가냘프고껑충한키,잡아당긴듯한긴목,검은테의안경…귀로만들었던청나라의마지막황제는그렇게만주땅에살던옛'신민(臣民)'권덕원의눈에뛰어들고있었다.

"'황제'는 말을 잘 했고 또 알고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권덕원은 이렇게 '황제' 부의가 남긴 인상을 더듬고 있었다.

부의는 도쿄 극동 국제군사법정에도 증인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그때 부의는 그가 일본 천황의 '괴뢰'였으며 '전범'이 아니라고 고집했다고 한다. 또 중국에 돌아가면 사형으로 판결될까 우려되어 기어이 일본에 남으려 했다는 것. 그러던 이 '황제'는 무순 전범관리소에서 6년 동안 교양을 받고 심양 특별군사법정이 설립되던 1956년에는 드디어 '인간 개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양특별군사법정에서부의가증언한것은괴뢰만주국총무청의차장후루미타다요미(古海忠之)의죄행이었다.

심양과 태원의 특별군사법정은 6월부터 7월까지 종국적으로 45명의 일본전범을 심판했다. 당시 공화국 정부의 재판 원칙은 "죄는 일본 군국주의에만 있고, 일본의 인민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45명의 일본전범은 모두 20년 이하의 유기도형에 언도되었으며 형기는 1945년 전패 후 구금된 시일부터 시작했다. 일본전범 재판에서 한명도 사형하지 않은 용서와 관용을 베푼 것은 중국공산당뿐이다.

1956년, 공화국 정부는 또 죄질이 경하고 죄를 뉘우치는 표현이 좋은 1017명 전범의 기소를 면하고 전부 석방하여 귀국시켰다. 심양과 태원에서 판결을 받은 일본전범도 1964년 3월 전부 석방했다.

심양특별군사법정의심판이끝난후권덕원은부분적일본전범의귀국을위한무순-심양-천진(天津)행에서안전보위,생활봉원,통역등을겸한요원으로있었다.

그때 일본전범을 수감하고 있던 무순 전범관리소는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전범 수감소로 되고 있다.

무순 전범관리소는 대문밖에 전사 1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뜰에는 보초마저 없는 평화로운 경상이었다고 권덕원이 회억하고 있었다. 광장과 화원이 있었고 도서관이 있었으며 이발소와 의료소, 식당, 주방이 있는 등 오장육부가 구전했다. 이게 ‘요양소’이지 ‘감옥’이 맞느냐는 물음을 받을 정도였다.

석방증서를 발급한 후 담당자는 전범의 가슴에 부착한 '전범명찰'을 뜯어냈다. 이때부터 그들은 일본전범이 아닌 외국 손님으로 변했고 그날 저녁 전범관리소가 아닌 호텔에 가서 국제 우호인사의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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