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

북경의 산중에 있은 고려인의 사찰

criPublished: 2022-08-16 11: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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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년봄인3월15일,영암선사가낙성되고화엄대법회를열었다.이때연등(燃燈)이10만이요,반승(飯僧,행사참석자)이천명이었다고한다.사찰을보수하기전에는승려한명이홀로사찰을지키고있었지만낙성된후사찰의승려가꾸준히늘어나궁극적으로백명으로헤아렸다고영암선사석비의기록이밝힌다.

영암선사가 이토록 번창하게 된 데는 왕실의 중귀인 장씨가 있었으며 자정원사 고용보가 있었다. 이보다 그들의 뒤에는 황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황후가 있었던 것이다. 자정원은 황실의 재정과 재산을 관리하던 기구이며, 고용보는 자정원의 원사를 지내면서 기황후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

1342년,고용보등은고려에가서기황후의모친이씨(李氏)를맞이해온다.영암선사는나중에기황후모족(母族)이안신(安身)하는또다른거처로된다.이처럼승려뿐만아니라속인역시영암선사와주변에거주했다.영암선사의승속(僧俗)은전부반도에서온고려인들이었다.

곡적산 산중에 있는 명나라 시기의 사찰 건물

영암선사가있는곡적산은어느덧대도(大都,지금의북경)에살고있는고려인은물론이요,반도의고려인들에게자금성처럼이름난곳으로되고있었다.고려인의이사찰은이역땅에서살고있는고려인들의구심점이요,향수에고달픈고려인들의몸과마음을달래주는쉼터였던것이다.

영암선사는미구에학자이곡(李穀,1298~1351)이글로특기할만큼고려사회에이름을떨치고있었다.이곡은1333년원나라제과(制科)에급제한고려인인데,가전체(假傳体)의소설『죽부인』,저서『가정집(稼亭集)』을세상에전하고있다.그보다이곡은글『곡적산의영암사석탑기』로당시고려사회에서화제가되었다고한다.그는또시『서산의영암사에글을부쳐』를짓는데시의앞에주해를달았으니,이때‘사찰의승려는모두향인(鄕人)이니라’고했다.‘향인’인즉같은고향사람이니사찰의승려들은이곡처럼모두그와같은고려인들이었다는것이다.

이곡은 부자가 함께 모두 곡적산에 가서 영암선사를 참배한 것으로 전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영암선사는 원나라 말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 이 사찰에 향불을 피운 신도 가운데서 고려인들이 제일 많았다. 대도에서 생활하던 고려인들은 대대적으로 사찰의 중건 작업에 나서고 있었다.

고려인박쇄(朴瑣)로올대(魯兀大)는이때영암선사의동쪽봉우리에사리석탑을세웠다.그는고용보처럼원나라의태감으로관아의동지민장총관(同知民匠總管)부사(府事)로있었다.우연히사리를얻었는데집에공양하다가나이가많게되자명산복지(名山福地)에보존하고자명당의곡적산에석감을만들어이사리를공양했던것이다.사리탑은팔면에여러부처를조각했으며영암선사에있는또다른이색적인풍속도로되었다.

기실 박쇄가 사찰에 석탑을 짓고 고용보가 사찰의 대단월로 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원나라 이래 환관이 출자하여 사찰을 보수한 것은 결코 희귀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명나라 때 곡적산에서 사찰이 다시 흥기할 수 있었다.

사찰 부근의 산봉우리에 섰는 사리탑. 원나라 때 박씨가 지었다는 그 탑일까

고용보는산너머이웃한운거사(云居寺)의석각경판보수에도적극후원한다.운거사는수․당(隋․唐)시기에세워진것으로역시영암선사처럼유명한사찰이다.북위(北魏)때태무제(太武帝)의법난으로절망했던어느승려가운거사에서석경(石經)의각석을발원했다.불경의일실(逸失)에대비하고정법을후손에전해야한다는일념으로운거사에석굴을파고석경을새기기시작했던것이다.중국의불교역사와전적의중요한문물일뿐만아니라세계문화유산의귀중한보물인석각경판은그렇게운거사에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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