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

북경의 산중에 있은 고려인의 사찰

criPublished: 2022-08-16 11: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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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말,고려혜월(慧月)선사(禪師)가운거사에서다섯조각의경판을보수했고고려인들이이불사(佛事)의공덕자로나섰던것이다.이때도고용보가단월로되었던것으로기록에전한다.운거사의『중수(重修)화엄당(華嚴堂)본기(本紀)』에는고려혜월선사가원나라말에석경산(石經山)화엄당의보수공사를벌였을때자정원사고용보가1천여민(緡)을시주했다고분명히기록하고있다.민(緡)은옛날동전을꿰는끈을이르는말인데1민은1000문(文)이며은1냥에해당한다.이때혜월선사가보각한다섯조각의경판은지금까지운거사에잘보존되어있다.

곡적산의 산중에는 사찰과 탑, 비석이 수풀을 이뤘다. 곡적산은 원나라 대도의 이름난 불교 성지로 되고 있었다. 대륙의 승려들이 언제나 찾아왔고 반도 승려들의 발걸음이 날이 지나도 끊이지 않았다.

반도의 대륙의 불교 교류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혀를 차게 된다.

“북경을 유람하는 관광객들은 제일 먼저 자금성을 머리에 떠올리는데요. 옛날 원나라에 참배를 가는 고려 승려들은 저마다 곡적산을 목적지로 삼은 것 같습니다.”

반도의당대3대선사(禪師)라고불리는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이선후로다대도에나타는데,이가운데서나옹과무학은영암선사에가서오랫동안머무르면서수행했다.나옹은지공의법맥을이어받은후고려말의선불교를중흥한대표적인선승(禪僧)이고무학은나옹에게법을계승함으로써고려불교를조선불교로잇고조선시대의불교초석을세우는데지대한역할을한고승이다.

영암선사는 고려인들이 중건할 그때부터 사실상 반도와 중원 불교문화의 교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원나라가1368년멸망하면서영암선사는다시쇠락의길을걸었다.그러나곡적산의고려의이야기는이로써끝나지않는다.곡적산에박씨처럼심은불맥(佛脈)은천년세월을계속잇고있었다.국경을넘은곡적산의불연(佛緣)은조선인승려에의해다시명나라까지이어진다.

이번에는반도에서승려들이부득불국경을건넜고대도에도착한후자연히곡적산을찾는다.조선초,태종과세종은숭유억불(崇儒抑佛)의정책을실행하면서불교를탄압하고있었다.이에불교계는불교의자정을주창하거나불교계를재편하며정부의탄압에맞섰다.일부승려는아예압록강을건너월경(越境)을시도했다.와중에승려적휴(適休)는국경이쪽에분명하게그의행적을남겼다.대도에이른후곡적산을참배하며미구에영암선사의근처에반약선사(般若禪寺)를창건하는것이다.

곡적산에심고쌓인고려이야기는문화,불교,종족과더불어달고쓴대하드라마를엮고있다.역사는그냥흐른다.거듭되는흥망성쇠를겪은곡적산에는역사의잔해가널려있다.오늘날영취선사,원통선사(園通禪寺),편탑(鞭塔),방울탑,사리탑그리고두기의태감무덤이남아있을뿐이다.기와며벽돌조각,석각의잔해가산의여기저기에제멋대로흩어져있다.

석각 잔해가 곡적산의 수풀에 널려있다

곡적산을 내리는데 길에는 더는 수레가 아닌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실북 나들듯 오가고 있었다. 부지중 영암선사의 폐허 앞에서 명나라의 웬 시인이 글로 남긴 감회가 새삼스레 눈앞에 떠오른다.

“서쪽하늘의 낙조에 탑이 외롭게 비끼고

유유한 골짜기에 폐허만 산산이 흩어졌구나.

풀이 마른 정원에 가을빛이 가득하고.

바람 따라 온갖 인연이 날려가네.

흥망이 이러하거늘 풍진세월을 다시 회억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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