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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산중에 있은 고려인의 사찰

criPublished: 2022-08-16 11: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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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올해 8월 24일은 중국과 한국이 수교한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중국과 한국은 산과 물이 잇닿은 인방이다. 일찍 몇 천 년 전부터 두 나라는 서로 우호 왕래를 했다. 세상에 유명한 ‘실크로드’는 고대 중국과 서역 각국 사이를 이은 교통로인데, 동쪽으로 반도와 열도에 잇닿고 있다. ‘실크로드’는 무역,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의 교류를 망라한다.

원나라때중국과한국문화교류의중심에는고려인의사찰이있었으니,이사찰인즉대도(大都)즉오늘의북경산중에있었다.

[북경의 산중에 있은 고려인의 사찰]

실제로제비가아니라독수리가물고온박씨의이야기이렷다.사찰은영취산(靈鷲山)에홀연히기대어섰는데,진짜독수리가날아와서골짜기에떨어뜨린박씨를방불케한다.영취선사(靈鷲禪寺)라는신명의이름은이렇게되어영물의독수리와한데이어진다.

영취선사는명나라때지은사찰의이름이다.정작사찰이북경서쪽의방산현(房山縣)의산중에맨처음나타난것은당나라때이다.그후에도이산에는여러사찰이세워졌으며많은승려가들어와서수행을하고깨달음을얻었다.요나라때영취선사에선원을세웠고이선원에‘거란대장경’을안치,독송대회를열기도했단다.

영취선사는전통적인풍수학에따라세워졌다.이곳은주변이산에둘려사상(四象)의좌청룡,우백호,후현무,전주작이분명한명당이다.

“원래고적산(古跡山)이라고불렀는데요.산에고적이아주많다는의미라고합니다.”

현지에전하는지명이야기이다.지난세기50년대까지산에는방울탑(鈴鐺塔),사리탑등보탑만해도30여기나있었다고하니말그른데없나본다.

그런데언제부터인가고적산은곡물을쌓아두었다는의미의곡적산(谷積山)으로둔갑했다.정말로곡물을골짜기에적치하고수비군이산기슭에주둔했다면서부근의마을이름도북군영(北軍營)이라고불렸다.어찌했든옛날북경으로향한운수차량은이곳에서늘길이막혀구불구불한구렁이의모양을이뤘다고한다.

그때 곡물이 곡적산의 산중에 얼마나 쌓여 있었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건 고려의 이야기가 쌀뒤주 같은 이 골짜기에 차고 넘쳤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박의 넝쿨처럼 자라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고 미구에 박의 향기를 산지사방에 풍겼다.

사찰 아래쪽의 북차영마을 입구. 이날 코로나 사태 때문에 한적한 모습이었다

“정말신화나전설을방불케하는데요.산중의고려이야기는실은원나라후궁귀인(貴人)의현몽에서시작되고있습니다.”

사찰의뒤편에불사활동을말해주는비석이세워졌는데,상기이야기는이비석에기록되어있다.‘대원칙사상만곡적산령암선사비(大元勅賜上萬穀積山靈巖禪寺碑)’라고하는이석비의기록에따르면사찰의이름은원나라임금이하사했다고한다.

“(1346년)중귀인(中貴人)장씨가현몽에따라곡적산을찾아가보니사찰이크게훼손되어있어이를안타깝게여겼다.자정원사(資政院使)고용보(高龍普)가대단월(大檀越,큰후원자)로자칭하고중건에나서이듬해에마쳤다.지정(至正,1341~1368)황제가‘영암선사(靈巖禪寺)라는사찰편액을내리고고려천담(天湛)에게’묘덕장로(妙德長老)‘라는존호를하사했다.”

그리하여영암선사는영취선사의또다른이름으로되었다.여기에서잠깐설명을하고지나자.사찰의큰후원자로나선고용보는화자(火者)로원나라에들어간고려인이다.원나라는화자를고려로부터징발하여환관으로이용했는데선후로약100여명의고려인이원나라에들어가환관으로되었다는기록이있다.와중에고용보는1333년공녀로온고려인기씨(奇氏)를추천하여원나라15대칸순제(順帝)의차를담당하는궁녀로들여보내는데,기씨가얼마후총애를받아후비를거쳐황후가되었다.기황후가황제에버금가는권력을갖게되면서고용보는권세가점점커졌다.원나라황실의가족인친왕과최고의신하인승상조차그의눈치를살필정도였다고전한다.

1347년봄인3월15일,영암선사가낙성되고화엄대법회를열었다.이때연등(燃燈)이10만이요,반승(飯僧,행사참석자)이천명이었다고한다.사찰을보수하기전에는승려한명이홀로사찰을지키고있었지만낙성된후사찰의승려가꾸준히늘어나궁극적으로백명으로헤아렸다고영암선사석비의기록이밝힌다.

영암선사가 이토록 번창하게 된 데는 왕실의 중귀인 장씨가 있었으며 자정원사 고용보가 있었다. 이보다 그들의 뒤에는 황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황후가 있었던 것이다. 자정원은 황실의 재정과 재산을 관리하던 기구이며, 고용보는 자정원의 원사를 지내면서 기황후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

1342년,고용보등은고려에가서기황후의모친이씨(李氏)를맞이해온다.영암선사는나중에기황후모족(母族)이안신(安身)하는또다른거처로된다.이처럼승려뿐만아니라속인역시영암선사와주변에거주했다.영암선사의승속(僧俗)은전부반도에서온고려인들이었다.

곡적산 산중에 있는 명나라 시기의 사찰 건물

영암선사가있는곡적산은어느덧대도(大都,지금의북경)에살고있는고려인은물론이요,반도의고려인들에게자금성처럼이름난곳으로되고있었다.고려인의이사찰은이역땅에서살고있는고려인들의구심점이요,향수에고달픈고려인들의몸과마음을달래주는쉼터였던것이다.

영암선사는미구에학자이곡(李穀,1298~1351)이글로특기할만큼고려사회에이름을떨치고있었다.이곡은1333년원나라제과(制科)에급제한고려인인데,가전체(假傳体)의소설『죽부인』,저서『가정집(稼亭集)』을세상에전하고있다.그보다이곡은글『곡적산의영암사석탑기』로당시고려사회에서화제가되었다고한다.그는또시『서산의영암사에글을부쳐』를짓는데시의앞에주해를달았으니,이때‘사찰의승려는모두향인(鄕人)이니라’고했다.‘향인’인즉같은고향사람이니사찰의승려들은이곡처럼모두그와같은고려인들이었다는것이다.

이곡은 부자가 함께 모두 곡적산에 가서 영암선사를 참배한 것으로 전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영암선사는 원나라 말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 이 사찰에 향불을 피운 신도 가운데서 고려인들이 제일 많았다. 대도에서 생활하던 고려인들은 대대적으로 사찰의 중건 작업에 나서고 있었다.

고려인박쇄(朴瑣)로올대(魯兀大)는이때영암선사의동쪽봉우리에사리석탑을세웠다.그는고용보처럼원나라의태감으로관아의동지민장총관(同知民匠總管)부사(府事)로있었다.우연히사리를얻었는데집에공양하다가나이가많게되자명산복지(名山福地)에보존하고자명당의곡적산에석감을만들어이사리를공양했던것이다.사리탑은팔면에여러부처를조각했으며영암선사에있는또다른이색적인풍속도로되었다.

기실 박쇄가 사찰에 석탑을 짓고 고용보가 사찰의 대단월로 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원나라 이래 환관이 출자하여 사찰을 보수한 것은 결코 희귀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명나라 때 곡적산에서 사찰이 다시 흥기할 수 있었다.

사찰 부근의 산봉우리에 섰는 사리탑. 원나라 때 박씨가 지었다는 그 탑일까

고용보는산너머이웃한운거사(云居寺)의석각경판보수에도적극후원한다.운거사는수․당(隋․唐)시기에세워진것으로역시영암선사처럼유명한사찰이다.북위(北魏)때태무제(太武帝)의법난으로절망했던어느승려가운거사에서석경(石經)의각석을발원했다.불경의일실(逸失)에대비하고정법을후손에전해야한다는일념으로운거사에석굴을파고석경을새기기시작했던것이다.중국의불교역사와전적의중요한문물일뿐만아니라세계문화유산의귀중한보물인석각경판은그렇게운거사에나타난다.

원나라말,고려혜월(慧月)선사(禪師)가운거사에서다섯조각의경판을보수했고고려인들이이불사(佛事)의공덕자로나섰던것이다.이때도고용보가단월로되었던것으로기록에전한다.운거사의『중수(重修)화엄당(華嚴堂)본기(本紀)』에는고려혜월선사가원나라말에석경산(石經山)화엄당의보수공사를벌였을때자정원사고용보가1천여민(緡)을시주했다고분명히기록하고있다.민(緡)은옛날동전을꿰는끈을이르는말인데1민은1000문(文)이며은1냥에해당한다.이때혜월선사가보각한다섯조각의경판은지금까지운거사에잘보존되어있다.

곡적산의 산중에는 사찰과 탑, 비석이 수풀을 이뤘다. 곡적산은 원나라 대도의 이름난 불교 성지로 되고 있었다. 대륙의 승려들이 언제나 찾아왔고 반도 승려들의 발걸음이 날이 지나도 끊이지 않았다.

반도의 대륙의 불교 교류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혀를 차게 된다.

“북경을 유람하는 관광객들은 제일 먼저 자금성을 머리에 떠올리는데요. 옛날 원나라에 참배를 가는 고려 승려들은 저마다 곡적산을 목적지로 삼은 것 같습니다.”

반도의당대3대선사(禪師)라고불리는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이선후로다대도에나타는데,이가운데서나옹과무학은영암선사에가서오랫동안머무르면서수행했다.나옹은지공의법맥을이어받은후고려말의선불교를중흥한대표적인선승(禪僧)이고무학은나옹에게법을계승함으로써고려불교를조선불교로잇고조선시대의불교초석을세우는데지대한역할을한고승이다.

영암선사는 고려인들이 중건할 그때부터 사실상 반도와 중원 불교문화의 교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원나라가1368년멸망하면서영암선사는다시쇠락의길을걸었다.그러나곡적산의고려의이야기는이로써끝나지않는다.곡적산에박씨처럼심은불맥(佛脈)은천년세월을계속잇고있었다.국경을넘은곡적산의불연(佛緣)은조선인승려에의해다시명나라까지이어진다.

이번에는반도에서승려들이부득불국경을건넜고대도에도착한후자연히곡적산을찾는다.조선초,태종과세종은숭유억불(崇儒抑佛)의정책을실행하면서불교를탄압하고있었다.이에불교계는불교의자정을주창하거나불교계를재편하며정부의탄압에맞섰다.일부승려는아예압록강을건너월경(越境)을시도했다.와중에승려적휴(適休)는국경이쪽에분명하게그의행적을남겼다.대도에이른후곡적산을참배하며미구에영암선사의근처에반약선사(般若禪寺)를창건하는것이다.

곡적산에심고쌓인고려이야기는문화,불교,종족과더불어달고쓴대하드라마를엮고있다.역사는그냥흐른다.거듭되는흥망성쇠를겪은곡적산에는역사의잔해가널려있다.오늘날영취선사,원통선사(園通禪寺),편탑(鞭塔),방울탑,사리탑그리고두기의태감무덤이남아있을뿐이다.기와며벽돌조각,석각의잔해가산의여기저기에제멋대로흩어져있다.

석각 잔해가 곡적산의 수풀에 널려있다

곡적산을 내리는데 길에는 더는 수레가 아닌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실북 나들듯 오가고 있었다. 부지중 영암선사의 폐허 앞에서 명나라의 웬 시인이 글로 남긴 감회가 새삼스레 눈앞에 떠오른다.

“서쪽하늘의 낙조에 탑이 외롭게 비끼고

유유한 골짜기에 폐허만 산산이 흩어졌구나.

풀이 마른 정원에 가을빛이 가득하고.

바람 따라 온갖 인연이 날려가네.

흥망이 이러하거늘 풍진세월을 다시 회억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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