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 개척
이런 기아 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지라지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 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 두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은 남자들 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 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임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닥쳤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을 관도 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 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 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흩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기아와 공포는 무서웠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기아보다 더 무서운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반‘민생단’투쟁이였다. 기아마저도 꺼꾸러뜨리지 못했던 투사들은 반‘민생단’투쟁으로 쓰러졌다. 김일환, 주도산, 석봉세 등 근거지의 지도자들은 이번 투쟁으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살해되였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이를 악물고 무서운 공포를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그 해 가을에는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그것을 어찌 그저 곡식이라고만 할수 있으랴. 그것은 인민들의 피이고 골수이며 반일정신이고 혁명의지였다. 부대에서는 인민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식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여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식량을 도로 인민들에게 보내주었다. 이렇듯 인민혁명군과 근거지 인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여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공고히 하였다.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의해 1935년 3월, 중공동만특위 기관은 라자구의 사도하자로 전이해간 후 원유의 혁명적 군중에 의거하고 여러 갈래의 항일력량과 련합하면서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 확대했다.
2,600여호 거주민들이 살고 있는 라자구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지키기 좋은 훌륭한 전략기지였다. 일찍 1930년 9월,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공작일군을 파견하여 라자구에 공산당조직을 건립, 중공라자구구위를 설립하였다. 구위의 령도 아래, 삼도하자와 하동, 태평구, 신춘자, 로무주거우 등지에 7개의 기층 중공당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청년단, 부녀회 등 반일혁명군중조직이 결성되였다.
1934년 독립사가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사충항의 항일구국군 등 기타 항일부대와 손 잡고 라자구전투를 벌린 후부터 라자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구로 되였다. 하여 독립사 제3퇀, 제4퇀 장병들과 반일혁명적 군중들은 요영구, 탕수허즈, 금창 등지로부터 라자구에 모여 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공동만특위 서기 위증민은 라자구의 사도하자에 온 후 원래 있던 공산당조직을 기초로 하여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를 건립하고 중공동만특위의 령도 아래에 두고 종자운을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5년 봄, 특위교통처가 설립되여 라자구항일투쟁을 지도하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중공동만특위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 지도기구가 정식으로 건립되게 되였다. 근거지내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농민위원회를 설립한 후, 춘경생산을 내밀도록 군중들을 동원했다.
독립사 제3퇀, 제4퇀 일부 병력은 라자구를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면서 적군에 대한 와해공작도 벌리였다. 큰 전투는 별반없었고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을 뿐이였기에 인민혁명군은 휴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부대는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에서 700여명 군중을 발동하여 진행한 ‘분량투쟁’과 ‘집단부락’ 건설 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일본군의 ‘집단부락’ 건설계획이 1935년말까지 한발자국도 진척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근거지에 대해 경제적 봉쇄를 하려는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버렸다.
리강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