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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 개척

criPublished: 2020-05-26 16: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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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

1935년 1월, 중공 만주성위는 위증민을 동만에 파견하였다. 위증민은 연길현 삼도만에서 얼마 동안 조사한 후, 2월27일부터 3월 3일까지 길림성 왕청현 대황외에서 동만 공산당, 공청단 특위 제1차 련석회의(세칭 ‘대황외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번 회의에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왕중산, 종자운, 주수동, 장창수, 리학충, 조아범, 리실일, 림수산, 최봉문, 강창연, 리동규, 김희문, 왕윤성 등 26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위증민의 사회로 진행되였는데 주요하게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 사업보고〉를 청취하고 지난 1년간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의 공작방침정책을 집행한 정황을 조사한 후 동만 당, 단과 군대의 공작방향과 긴급임무를 제정하고 당단특위 령도기구를 개조했다.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를 철소하고 위증민, 리학충, 리광림, 왕윤성, 왕정렬, 왕중산, 마진금 등으로 특위를 조직한 후 위증민이 특위서기를 담당했다. 공청단특위 서기는 주수동이 맡았다.

인민혁명군 건설공작을 강화할 데 대한 중공만주성위의 2월 1일 지시에 근거하여 1935년 3월 21일, 왕청현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련석회의(세칭 ‘요영구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는 독립사 정위 왕덕태와 특위 서기 위증민의 사회로 진행되였다. 회의에는 독립사의 지도자들과 제 1, 2, 3, 4퇀의 정위, 공청단만주성위 특파원 종자운 및 공청단동만특위 책임자 등 도합 11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오는 4월에 동만항일련합군 총지휘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으며 〈인민혁명군정치사업조례〉, 〈인민혁명군전사대우조례〉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제2군 독립사의 활동방향을 확정하였는데 수분대전자(왕청현 라자구지대)와 안도현 처창즈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여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교통이 불편한 돈화, 화전, 동녕, 녕안, 목릉 방면에서 유격활동을 벌릴 것을 결정하였다.

회의에서는 독립사 지도부와 각 퇀 간부들을 조절하였다. 왕덕태가 사장으로, 리학충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리승규,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장봉운,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하덕윤, 정위에 왕윤성이 임명되였다.

회의 후, 동만특위는 수분대전자로 이동하고 독립사 본부는 처창즈 쪽으로 이동하였다. 왕청과 훈춘의 근거지 군민들은 수분대전자에 집결하고 연길현과 화룡현의 유격근거지 항일기관과 군민들은 처창즈로 이동하였다.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부터 시작하여 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에서 범한 ‘좌’경 착오가 점차 시정되기 시작했으며 진일보로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관철되게 되였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동만특위의 파견을 받은 화룡현위 서기 김일환과 박덕산(김일)은 1933년11월, 처창즈에 가 유격구 개척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그들은 처창즈에 온 후,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군중을 조직하여 반일회, 농민협회 등 반일혁명단체를 무어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하여 삼림대를 쟁취하여 그들로부터 식량, 군복,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받아 처창즈유격근거지 개척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되였다. 이리하여 1935년 1월, 연길현과 화룡현, 안도현 각 근거지의 군민 1,000여명이 처창즈에 집중되여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정식 건립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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