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 개척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 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 잡았으며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공산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
근거지 군민들은 나무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귀틀집을 지었고 정부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적 점령구의 인민들을 통해 종자와 부림소를 얻어왔다. 한편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여 오동앙파, 쓰치개, 송강 등 방면으로 쳐들어올 적들을 밤낮으로 경계했다.
근거지에서는 또 서남차의 고동하 지류 량안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병기공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 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처창즈유격근거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여 적들의 ‘토벌’ 을 당하게 되였다. 독립사 제2퇀 전사들은 근거지인민들의 지지 속에서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어놓으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근거지에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봉쇄로 말미암아 초봄부터 기아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때의 정경을 《준엄한 시련 속에서》(려영준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하여 송피를 벗겨먹고 우묵우묵 패인 물구뎅이에 가서 개구리알까지 떠다가 삶아먹으며 일하였다. 햇풀이 땅 우로 봉긋이 솟아오르면서부터 남녀로소가 산과 들에 널려서 숨위나물, 삽지, 고사리, 기름고비, 물고비, 더덕, 도라지, 참나물, 절나무, 개암나무, 한충, 메마늘, 세투리, 메뿌리, 씀바귀, 냉이, 산미나리, 산시금치, 참나리, 개나리 등 먹을 수 있는 풀은 죄다 캐들였다. 이런 산나물은 송피보다 먹기 좋았다. 하지만 기름 한방울도 없이 산나물만 먹었다. 간장, 된장, 소금마저 없어서 맹물에 삶아먹거나 생나물을 그대로 씹어먹다 보니 나중엔 사람의 몸에 풀독이 오르고 병이 나서 100여명이 사망되였다…”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조선로동당출판사 출판)에서도 그 때의 간고했던 상황을 쓰고 있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매운 재불에 송기를 넣고 3시간 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 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 후 돌 우에다 놓고 망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넣어 죽을 쓰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장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뱀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쥐를 잡아먹기 시작했다…씨붙임을 할 때 신고 일하던 도로기도 작식가마에 들어갔다. 도로기를 우려낸 즙쯔레한 물을 한공기씩 마시고 병사들이 포복전진을 하듯 매밀이를 해가며 봄파종을 하였다. 오늘 씨를 뿌리고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기도전에 그 씨를 파먹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대중단체들에서는 씨붙임이 끝난 밭들에 보초를 세우고 종자를 파먹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보초들마저도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씨앗을 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