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족의 역사
‘키르기스’란 민족의 자칭일 뿐만 아니라 이 민족에 대한 타민족의 지칭이기도 하다. ‘키르기스’란 단어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하나는 ‘키르기스’가 40의 복수로 40개 부락을 뜻한다고 풀이한다. 다른 한 설법에 따르면 ‘키르기스’가 ‘산 속의 유목인’, ‘산 중의 우구스인’, ‘초원의 사람’을 뜻한다. 또 ‘키르기스’가 40여명의 처녀를 가리킨다고 풀이하는 설법도 있다.
키르기스족의역사는2천여년전으로거슬러올라갈수있다.키르기스족선민에대한기재는‘사기·흉노열전’(史记·匈奴列传)에서최초로등장한다.기원전3세기말엽,흉노가정복한북방의여러민족중‘격곤’(鬲昆)이란민족이있었는데《한서》(汉书)에서도‘격곤’(隔昆)이라고기재했다.키리기스어의음역으로부른격곤민족이바로키르기스족의선민들이다.‘사서’의기재를보면당시의격곤은흉노지역이북,지금의몽골인민공화국이북의키르기스호주변지역에살았다.
당나라이전에키르기스족은주로유목과어렵에종사했다.당나라때에이르러키르기스족은큰발전을가져와인구가수십만명에이르렀고그중승전할수있는군대가8만명에달했다.이때그들은주로목축업에종사했으나농업생산이이미일정한정도로발전했다.그들은철로주조한병기를사용했으며십이지신으로연대를기록했다.이는고대키르기스족사회경제문화가당시북방의여러민족중비교적선진적이었음을말해준다.키르기스족의언어는알타이어계돌궐어족에속한다.기원5세기와6세기이들은돌궐의통치를받아고대돌궐어문을사용하기도했다.흉노지역서부에거주했던키르기스족은한나라때흉노모돈선우(冒顿单于)에게정복되었다.그뒤선비(鲜卑)와유연(柔然)등민족의통치를받기도했다.
수나라와당나라때키르기스족은‘계골’(契骨)로불렸다.이들은가장먼저돌궐의통치를받고돌궐과혼인관계를맺었다.정관(贞观)초년에돌궐은당태종의탄압을받게되고계골은설연타(薛延陀)에귀순하게된다.그후수십년간이들은북방의여러민족과당나라와원만한관계를유지했다.당숙종건원(乾元)연간계골은위구르족인회흘(回纥)에패해회흘에귀순하며힐알사(黠戛斯)로불렸다.9세기20년대힐알사인들은수령아러(阿热)의영도하에점차강대해져회흘의통치에반항하기시작한다.이투쟁은20여년간지속되었으며아러가회흘대장군의도움으로십만병사를파견해회흘칸국을침입해회흘의수령을살해한다.하여회흘족은고향을등지고남서로이주하며아러를수령으로하는힐알사통치계급은원회흘칸국의영토에한때강성했던힐알사칸국을세운다.
10세기에이르러거란족의흥기하면서힐알사는거란족정권인료(辽)의속국이되었다.
원나라 때 키르기스족은 치얼지스 또는 지리지스라고 불렸다. 12세기 말엽 몽골이 흥기하면서 키르기스족은 몽골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다. 1206년 테무진이 칭기즈칸으로 자처하며 키르기스족을 포함한 일부 백성들을 자신의 남동생에게 봉해주었다.
원나라멸망후키르기스족의이웃인몽골오이라트부(瓦剌部)가강성해져키르기스족은또오이라트부에예속됐다.15세기상반기오이라트부의수령이죽으면서그들의세력이약화돼서쪽으로이주하며키르기스족도오이라트부의통치에서벗어나게된다.
16세기, 예니세이강 일대의 키르기스족은 네 부분으로 나뉘며 네 개의 왕국이 세워진다. 16세기 말, 17세기 초반 준갈이부가 점차 강대해지면서 키르기스족의 대부분은 준갈이부에 예속되며 이 곳은 준갈칸과 안탈칸이 쟁탈하는 중요한 지역의 하나가 된다. 이 때 제정러시아가 동으로 침략확장하며 키르기스지역을 노린다. 키르기스족 인민들은 제정러시아의 침략에 강하게 반발해 나서나 열세에 처해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