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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저족의 역사

criPublished: 2019-07-30 18: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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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의 요나라는 여직의 여러 부에 대한 압박이 극심했고 이로 하여 여직의 여러 부는 분연히 일떠나 반항했다. 기원 1115년 여직의 여러 부는 수령 완연아골다의 인솔하에 거란왕조를 뒤엎고 금나라를 세웠다. 금나라는 허저족 거주지역에 후얼하로라는 군정합일의 기구를 설치했다. 흑룡강하류에는 하리빈천호 등 관리기구를 세웠다. 이런 기구는 기층 군정합일의 준군사조직이었다.

원나라 때에 와서 동북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흑룡강입해구지역에 정동원수부를 세워 흑룡강, 우수리강과 동북의 광대한 지역을 관할 했다. 원나라 정부는 허저족이 집거한 송화강하류지역에 다섯개의 만호부를 세웠다. 원나라 때는 흑룡강하류 출해구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여 이곳에 관청을 세우고 대량의 선박을 건조했으며 수상교통선을 개통함으로써 이 지역의 경제문화의 발전을 추진했다.

명나라 때에 와서는 북방 여러 민족에 대해 회유정책과 이이제이의 정책을 펴면서 동북변경에 대한 관할과 통치를 강화했다. 특히는 송화강,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에서 동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에 대한 관리를 보강했다. 명나라 영락 7년(기원 1409년)에 흑룡강입해구의 특림에 누르간도사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 영락 11년(1413년)에 누르간지역에 영녕사비석을 재건하여 명나라가 이곳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는 점과 소수민족에 대해 안무정책을 실시한 업적을 기록했다.

명나라 떄는 여진의 여러 부가 재조합을 하는 시기였다. 명나라 초반 여진 여러 부의 명칭을 보면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이 있었다. 그중 건주여진은 장백산과 수분하, 목단강유역에, 해서여진은 금나라 완연씨의 후손으로 송화강중류, 아스하류역에 살았다. 야인여진은 송화강하류지역, 흑룡강중하류지역, 우수리강류역에 주로 살았다. 이중에서 야인여진의 세력이 재빨리 커졌고 이들은 목단강하류지역에서 건주여진과 전쟁이 발발했고 결과 건주여진이 패해 남쪽으로 이주했다. 건주여진은 50여년간 떠돌다가 요녕 쑤커쑤호하 지역에 정착했고 이들은 후에 만주족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야인여진은 건주여진을 쫓아낸후 여러 부락들을 점차 통일시켰고 후에 “허저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청나라 초반에 허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후르하부”, “워집부”,”와르카부”, “사견부”, “싸하린부”로 정했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후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방의 여러 부족을 병탄했다. 1599년부터 1644년까지의 기간에 허저족 거주지역에 대해 17차에 달하는 정벌을 감행했다. 이는 허저족의 여러 부락이 청나라의 침탈에 완강히 저항해 왔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후 청나라는 책략을 바꿔 회유정책을 펼쳤으며 그 정책이 효과를 보자 1644년 정월에 북방 여러 부락에 대한 병탄전쟁을 끝냈다.

청나라 강희 53년에 삼성성에 협령아문을 세웠고 군사를 관리하는 세관좌령을 임명했다.

삼성아문의 관할범위는 송화강하류,목단강, 흑룡강하류,우수리강류역에서부터 동해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청정부는 이 지역과 주변지역에 대한 관리와 통치를 강화했고 부락과 마을에 관리도 강화되었다. 청정부는 이곳에서 비교적 개명한 민족구역자치성격을 띤 조치를 취했기에 2백여년간 변강건설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민족단결을 촉진했고 중원문화가 널리 퍼지고 생활수준이 점차 제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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