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

원사 김홍광의 숨겨진 "전설"

criPublished: 2014-05-20 17: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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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정원"에는걸음마다행운이따르고있었다.한때연구소에서는하늘의항공엔진을화학공장의동력원으로연구,개발하였다.오중화(吳仲華,1917~1992)교수가직접이프로젝트를추진하였다.오중화교수는공정열물리학의창시자로날개바퀴의3원유동이론을만든과학자이다.김홍광은오중화교수의프로젝트에직접참여하여거인의구상과연구,개발의전과정을눈으로익히고몸으로겪을수있는절호의기회를가졌다.

1991년, 김홍광은 유엔개발계획의 파견으로 일본 도쿄공업대학에 간다. 도쿄공업대학은 공정기술과 자연과학연구를 위주로 하는 세계 일류의 대학이다. 이때 김홍광은 그의 전문인 열물리의 계속이 아니라 전혀 다른 학과인 화학환경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온도나 압력의 물리반응에 질적 변화라는 화학반응을 가미한 거지요."

연구의 융합반응 다시 말해서 다른 학문분야를 서로 융합시키는 작업이었다. 현재의 많은 학문분야는 제각기 많은 연구들이 수행되었고 나름대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의 학문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벗어나 다른 학문분야의 융합을 통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때그의지도교수는이시다(石田)교수로,세계적인석학이었다.말그대로김홍광의세계에는거장들이마치기다렸다는듯연이어나타나고있었다.이에따라그의눈앞에는또다른세상이화려한그림처럼하나둘펼쳐지고있었다.

사진설명:김홍광원사가 이끄는 연구팀팀의 태양에너지 열화학발전시스템 개발

드디어 김홍광의 세계에서도 전설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

훗날 김홍광은 이산화탄소 포집에 관한 화학사슬의 연소동력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연소 초기단계에 이산화탄소를 회수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의 제3세대 에너지환경 동력시스템을 제기했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처음 발견한 새로운 화학환경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유엔 정부간 기후변화전문위원회(IPCC)는 이산화탄소 포집과 매몰 보고서(2005)에 "김홍광 등은 화학사슬 연소의 연구에서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특별히 이름을 거명하여 언급했다.

현재 김홍광은 미국과 일본에 전매특허 2종, 국가 발명전매특허 26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학술논문 206편, 학술저서 3부를 발표했다. 이런 공로로 국가자연과학 2등상, 중국과학원 자연과학 2등상, 석유공업부 과학기술진보 1등상 등을 받았다.

사진설명:2002년 오스트리아에서

무지개에는 색조가 없었다

기자단의 일행 중 누군가 진부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물음을 꺼냈다. "원사님의 어릴 때의 꿈은 무엇이었죠?"

그런데 김홍광의 대답은 일행의 기대를 한참이나 빗나가고 있었다.

"꿈이라니요? 그때는 먹고 사는 자체가 꿈이었습니다."

사실상 김홍광은 어릴 때 공부를 남달리 즐겼다. 진짜 신이 들린 것처럼 공부 자체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공부 성적은 또래에서 언제나 앞자리였다. 남다른 흥미라고 할까, 중학교 때에는 물리실험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다.

"용돈을 모아서 부품을 산적 있습니다. 그걸 일일이 조립했지요."

구들에 뒹굴고 있던 부품들이 한데 묶여 반도체가 만들어졌다. 일명 "김홍광"표의 제품이었다. 이 엉성한 제품이 백화점의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낸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반도체 조립품은 더는 엄두를 내지 못할 사치품으로 되었다. 김홍광이 13살 때 의사로 있던 모친이 페니실린 이상 반응으로 불시에 사망했다. 그때 위로 누나 하나, 아래로 동생 둘이 있었다. 식구가 올망졸망한 집안에는 갑자기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부친은 구들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부친도 김홍광이 18살 나던 해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졸지에 양친을 모두 여읜 집안에는 크고 작은 아이들만 남았다. 장자인 김홍광은 어린 나이에 세대주로 되었다. 그는 교과서 과목이 아닌 크고 작은 가사를 직접 일일이 챙겨야 했다. 그는 새벽이면 눈을 잡아 뜯으면서 일어나 밥을 짓고 어린 두 동생의 도시락을 챙겼다. 누나는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직업상 늘 야근을 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 쓰라린 기억에 남는 하나의 "행복"이 있었다. 김홍광은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장춘 현지에 쉽게 남을 수 있었다. 그때 지식청년이라고 하면 모두 하향 즉 농촌으로 내려갔다. 하향 지식청년은 19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자원 혹은 부득불 도시에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으로 된 청년들을 말한다.

"집에 동생들을 돌 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 덕분에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가 된 겁니다."

김홍광은 전기수리공으로 있으면서 아스라한 전선주에 기어올랐고 두메산골의 골짜기도 누비고 다녔다. 일찌감치 사회에 뛰어들었지만 가난한 살림은 그냥 펴일 줄 몰랐다. 월 노임이 불과 22원 정도였다. 그야말로 한 달을 살면 다음의 한 달을 근심하는 암울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1977년, "문화대혁명"의 충격으로 10년 동안 중단되었던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중국은 이로부터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하는 봄날을 맞이했다. 공부 밑천이 두둑했던 김홍광은 선뜻이 대학입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때는 4,50명의 수험생 가운데서 겨우 하나 꼴로 대학생이 나오고 있었다.

김홍광은 이듬해 동북전력대학에 입학하는 쾌거를 올린다. 말 그대로 바늘구멍을 빠져나온 것이였다.

"그때는 문과 성적이 너무 떨어져서 더 좋은 대학으로 가지 못했어요."

김홍광은 이렇게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비사를 밝힌다. 그의 화학 성적은 2점 모자라는 만점으로, 수학과 물리, 화학 성적은 크게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문과 정치 성적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합격선에도 이르지 못해 뒷다리를 당겼다.

그때 김홍광이 재고 끝에 지망 신고란에 써넣은 것은 실용학문인 "열에너지의 동력"이었다. 솔직히 생계를 해결할 직업이 첫째가는 고민이었으며 먼 훗날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곤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깊고 긴 터널의 저쪽에서 드디어 가느다란 빛줄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사진설명:세미나 현장에서 발제하고 있는 김홍광 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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