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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색교육을 끊임없는 정신력량으로 전환

criPublished: 2020-12-29 10: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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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왕청현동광진묘구촌대북구의입구에는현지사람들에게익숙한렬사릉원이있다.1934년3월21일,27세밖에안된우리당초기우수당원이며혁명활동가이며중국좌익작가련맹발기인중한사람인동장영(童长荣)동지가일본군과의전투에서장렬하게희생돼이곳에영원히잠들었다.

동장영은안휘성종양현에서태여났다.선후로재일중공특지(特支)지도자,중공상해호중구위서기,하남성위서기,대련시위서기등직무를맡았다.9.18사변후당에의해동만지역에파견돼동만특위서기를맡았으며동만각현반일유격대와유격근거지를건립하고동만인민을지도하여간고한항일무장투쟁을이어갔다.

1932년 겨울부터 1933년 봄까지 동장영은 유격구의 광범한 군민을 이끌고 깊은 산속에서 일본군과 60여차례의 전투를 벌여 수백명을 섬멸했으며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1934년 3월 21일, 적들이 산속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동장영은 왕청현 십리평의 묘구에서 일본 침략군과 마주치게 됐다. 포위당한 동장영은 지병이 낫지 않고 행동이 불편한 등 절망적인 상황에서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곳에서 희생됐다.

동장영기념관은동장영렬사의일생에근거해소년련마(少年磨砺),혁명투신(投身革命),백색지구투쟁(白区斗争),피로물든동만(浴血东满),영원불멸할영명(英名永存)등5개부분으로나뉘는데렬사화상과사진80여점및당시항일련합전사들이사용한무기,생활용품과일본군으로부터빼앗은전리품등실물을전시했다.

전국 '시대 본보기'이자 왕청현 차세대관심위원회 주임 김춘섭은 "2014년, 이곳은 길럼성당학교에 의해 전성 홍색교육기지시범점으로 인정됐고 전성 6개 '동북항일련군 당사당성 교육양성현장 교수점'중 하나로 확립됐다. 2018년 6월, 성당위 선전부, 당사연구실, 성관광발전위원회, 성동북항일련군연구회에 의해 첫번째 동북항일련군 홍색교육기지로 확정됐다"고 소개했다.

산마다 진달래, 촌마다 렬사비.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는 성립되고 철수되기까지 3년 밖에 안 걸렸지만 많은 혁명유적을 남겼다. 현재 중공 동만특위와 왕청현위기관유적, 김금녀렬사기념비 등 20여곳 유적 혹은 기념비가 남아있다. 홍일촌 당성교육기지는 김상화렬사를 위주로 '한개의 기념비, 두개의 박물관, 한개의 거주지'의 주제교육기지를 구축했다. 현재 해마다 대량의 당원간부, 중소학생과 각계 군중들이 이곳에 와서 '항일련군의 길 다시 걷기' 등 애국주의교육활동을 진행한다.

김금녀는 소왕청의 한 전투에서 불행하게 일본군에 의해 체포됐다. 적들은 김금녀에게 강경책도 쓰고 회유책도 써봤지만 그녀는 시종 동요되지 않았고 혁명립장이 확고했으며 당의 비밀을 목숨을 걸고 지켰다. 결국 분노한 적들은 그녀를 혹독하게 때려 살해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12세였다.

김상화는 연변지역의 초기 맑스주의 전파자이다. 그는 당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혁명필승에 대한 신념으로 희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군중을 발동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했고 투쟁하면서 당원을 발전시켜 기층 당조직을 세우고 겅대해지게 만들었으며 왕청현 각 민족 군중들을 이끌고 반일투쟁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31년 2월 5일, 김상화는 대흥구진 사방산 아래서 적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유적비, 기념비는 보통 건축물이 아니다. 여기에는 혁명렬사들의 불요불굴하고 영용하게 투쟁한 민족정신이 응집되여있다"고 말하면서 김춘섭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생명을 바친 혁명영렬들을 잊어서는 안되고 영웅들을 료해하고 영웅들을 학습하고 영웅들을 계승하며 영웅들을 수호하여 그들의 홍색유전자를 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청현당위 상무위원, 조직부장 허해란은 항일련군사적을 잘 발굴하고 홍색자원을 잘 리용하며 홍색전통을 잘 발양하고 홍색유전자를 잘 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왕청 실제와 결부해 왕청인상, 왕청이야기, 왕청특색의 당성교육기지를 구축하고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명기하는 것을 주제로 형식이 다양한 당성교육활동을 전개해 항일련군정신과 홍식유전자를 빈곤탈출, 난관공략, 향촌진흥의 정신적 동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길림성 왕청현 리강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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