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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명인 비하인드 스토리] 후직 편-4, 영원한 농관

criPublished: 2022-10-07 10: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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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원한 농관

그때중화대지의동쪽과남쪽에는큰물이지고북쪽과서쪽에는가뭄이들어우가몇년째물을다스리는중이었다.후직이여전히농사를가르치며황하(黃河)의하류에이르니홍수가바다로흘러들도록도처에서물길을파고있었다.

우가 후직에게 말했다.

“여기는 물이 많아서 벼를 심는 것이 좋은데 물이 많은 곳에서도 잘 자라고 가뭄이 들어도 소출이 좋은 종자를 찾아보게.”

“물도 싫어하지 않고 가뭄에도 잘 자라는 종자를 찾으라니,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후직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몸은 벌써 움직여 홍수지대와 가뭄지대의 모든 곡물을 돌아보며 우량 종자를 찾아 몸소 재배하면서 논밭 관리의 기술을 도출해냈다. 곧 재해지역의 농업생산이 재빨리 회복되어 백성들이 배를 곯는 현상이 사라졌다.

후에순임금이남방을시찰하다가구의산(九疑山)에서병사했다.만백성은우를천자로추앙했고후직은여전히농관으로곳곳을다니며농사를가르쳤다.

가뭄이심한서북지역에서후직은백성들을거느리고위하(渭河)기슭에서경작지를개발했다.오랜가뭄으로땅이척박해사람의힘으로개간하는데많은어려움이있었다.모든일에행동이먼저인후직은당연하게사람들과함께개간의시범을보였다.위하의물로땅을적셨음에도척박한땅은여전히굳어밭을갈기가쉽지않았다.

후직은 비록 몸집이 우람하고 힘이 장사여도 나이도 있고 오랫동안 너무 에너지를 쏟은 탓에 노고가 쌓여 반백의 나이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노쇠해 보였고 몸도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리하지 말라고 권고해도 후직은 여전히 몸소 밭에 나가서 밤낮으로 일했다. 그리고 무더운 어느 여름날 오후 기아와 갈증에 지친 후직은 밭에서 쓰러졌다.

사람들이 후직에게 미음을 떠먹이고 있는데 후직의 손자인 숙균이 소를 타고 달려왔다. 그는 소 잔등에서 내리자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일어나세요. 할아버지가 밭을 가느라 힘들어 쓰러지신걸 알아요. 그래서 제가 소가 밭을 갈 수 있게 훈련시켰어요. 이제 소가 대신할 테니 모두 밭 가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돼요.”

숙균의 말이 끝나자 신기하게 후직이 눈을 뜨더니 기대감으로 넘친 눈길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숙균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소에게 쟁기를 메워 밭을 갈기 시작했다. 과연 소가 쟁기를 끌고 지나가자 밭고랑이 줄지어 나타났다. 소 한 마리가 농부 백 명 맞잡이였다. 소가 밭을 가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있을 때 후직은 손자의 장한 일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짓고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후계자의 성과를 보았으니 후직은 시름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소로 밭을 간 이 숙균은 농업문명의 개척자로 인정된다. 소로 밭을 갈기 시작하면서 농업생산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고 노동의 효율성도 전에 없이 높아졌다. 그리고 이 농업생산의 모델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현재도 중국의 적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소로 밭을 갈고 있다. 따라서 후직의 이 손자는 중국인들로부터 밭의 신으로 인정된다.

신묘한출생스토리를가진후직은삶의마감도전기적색채가다분하다.후직은오늘날사천성도의벌판인도광(道廣)벌판에묻혔는데그때로부터이곳에는춘하추동언제나오곡이풍성하고수초가무성하며백화가피어났다.또가을이면봉황이온갖새를거느리고나타나공중에서춤을추는기이한경관도나타나영원한농관후직이죽어서도이땅과함께함을보여주었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다. 후직은 4천 년 전에 오곡의 씨앗을 발견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후직의 최대의 공로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친 것이다. 후직이 있었기에 농경문명이 중국의 눈부신 역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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