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

머로족의 역사

criPublished: 2020-06-25 22:5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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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로족은 중국 남방의 광서장족자치구와 귀주성에 모여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머로족의 인구는 약 20만명에 달한다. 1956년에 국무원은 이들을 머로족으로 공식 확인했다. 머로족은 본 민족의 언어는 있으나 본 민족의 문자가 없으며 한자를 통용한다. 머로족의 민족 언어는 한어-티베트어계 장족뚱족어족의 뚱족 수이족 갈래에 속한다.

다수의머로족노인들은본민족을‘링’(伶)이라고자칭하며소수지역에서는진(謹)또는‘본지인’으로자칭한다.한족은머로족을“머로’(仫佬)라고지칭하고장족들은광서장족자치구에거주하고있는이웃민족머로족을‘부진’(布謹)이라고부른다.

머로족은그역사가유구하다.머로족은귀주고원최초의개척민족의하나로알려져있다.머로족의원고시대선민들도기타민족의선민들과마찬가지로찬란한선사시대문화를창조했다.1958년류강(柳江)현신흥농장통천(通天)암옆동굴에서하악골이없는완정한두개골과가슴등뼈,요추,늑골등이출토됐다.이는5만년전구석기시대말기고인류의화석으로판정되어‘류강인’으로이름지어졌다.또부근에서발견된‘류강인’동시기문화유물을볼때당시의원시인들은산을등진물가에자리한석굴에거주했으며식물채집과동물수렵으로생계를유지했고이미음식을불에익혀먹는단계에들어섰다.그리고함께노동하고평균분배하며모계씨족중심의원시공사생활을했다.1965년과1973년고고학자들은계림시남부의독산(獨山)증피암(甑皮岩)사방60평방미터범위내에서18구의인체골격을발견했으며이를증피암인이라고명명했다.증피암의출토물로부터당시의사람들이신석기시대에처해있었음을알수있다.전문가들은증피암인과류강인이밀접한혈연관계가있다고본다.바로광서의토착민족에속하는머로족의원고시대선민이증피암인이고증피암인의선조가류강인인이라는것이다.

전국시기말기부터령남(嶺南)서부일대에거주한머로족선민들은서구낙월(駱越)민족의한갈래에속했다.그후진(秦)나라가령남지역을통일하면서이곳의머로족선민들은령남의기타민족과함께중화민족의대가정에합류했으며‘료’(僚)로통칭되었다.한나라때에는많은한족들이령남지역에선진적인생산기술을갖고와령남지역의정치와경제의빠른발전을떠밀었다.수나라와당나라때중앙왕조는령남소수민족지역에서견제정책을취해수십개주와현을설치하고현지의소수민족수령을관리로임명했다.이런관리들에대해중앙왕조는그들이중앙왕조의정권을승인하고지시에복종하며의무를이행하면관리직을세습시키고우대해주었으며현지의사회제도와경제구조를보류할수있도록했다.이시기머로족선민들인령남‘료’의사회경제는한층발전해소를부려밭을갈기시작했고벼농사기술도한층제고되었다.그리고수공업제련과도금,도자기제조등기술도상당한수준에이르렀다.진(晉)나라때머로족의선조들은‘푸료’(濮僚)로,남북조시기에는‘무룽료’(木壟僚)라고불렸다.송나라와원나라때머로족은료,링등으로부터단일민족으로분화되었다.원나라때부터는머로족과관련된기재가점점많아지기시작했다.사서에기재된‘무로’(木佬),‘무뤄우’(木婁),‘무요우’(木搖)등은모두머로족을가리키는것이다.사서의기재와전설로부터머로족이늦어도원나라와명나라초반에이미라성(羅城)일대에거주했음을추론할수있다.당시명나라는송나라와원나라의제도를이어라성과천하(天河),의산(宜山)등머로족의집중거주지역에유관(流官)을계속설립했다.이때머로족은봉건사회에들어섰으며해마다여름철과가을철에쌀을조세로조정에바쳤다.1933년이후국민당세력이머로족지역에심입하면서봉건종법제도가한층강화되고빈부의격차가크게나타났다.하여부농이점유한토지는중농의2배에서4배,빈농의5배에서6배심지어10배에달했다.잔혹한착취로빈곤과기아에허덕이던광범한머로족인민들은기타형제민족과함께반봉건투쟁에나섰으며명나라와청나라때크고작은규모의무장투쟁을수차례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이 창당 된 후 머로족 지역의 투쟁은 점차 당의 영도하에 진행됐으며 이들은 류북인민해방부대에 참가해 각 족 인민들과 함께 국민당 군대의 진공에 항격했다. 이 유격 제1대대 제 3중대의 70%이상의 대원들이 머로족이었다. 이들은 1949년 11월 인민해방군을 도와 라성을 해방했다. 1984년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머로족은 라성 머로족 자치현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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