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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족의 세시풍속과 금기

criPublished: 2020-05-12 13: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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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제도:

써족 사회는 부모를 중심으로 자녀들과 소 가정을 이루는게 특징이다. 한 가정의 식솔은 보통 3~5명이다. 아버지가 세대주로 한 가정에서 지고지상의 권력을 행사해 가정의 경제 소득과 지출을 관리하고 농업 생산을 배치하 는 외 가정을 대표해 여러가지 사회 사무를 처리한다. 가정 성원들은 아버지의 단속과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경비 지출도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한 가정의 안주인인 어머니는 가정내 사무와 친척 간 왕래를 조율하며 집안 일을 돌보고 가축을 기르며 논밭에 가 농삿일을 하기도 한다. 써족의 자식들은 결혼 후 분가해 독립 생활을 하며 부모는 막내 아들과 함께 생활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써족의 가정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가 약화되고 민주 협상과 남녀평등,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화목하고 서로 돕는 신형의 가정 관계가 점차 형성되고 낡은 도덕적 예의 규범이 사회주의 새 도덕 기준과 새 풍기에 의해 대체되었다.

혼인 풍속: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전부터 써족은 일부일처제를 시행했으나 옛 혼인 풍속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써족은 동성 혼인을 거부하며 보통 본 민족 내부의 반씨와 람씨, 뢰씨, 종씨 등 4대 성씨 간 서로 통혼한다. 역대 통치자들의 민족 압박과 차별시 정책으로 써족과 한족은 통혼이 엄금되었으며 이는 은연중 써족 내부의 가규가 되었다. 해방 후 민족 평등과 단합 정책의 시행으로 써족과 한족 간 통혼하는 경우가 날로 많아졌다. 고대에 써족 청춘남녀들은 자유 연애의 전통이 있었으며 대창 혼사가 써족 선민들의 혼인 풍속이었다. 대창 혼사란 써족의 청년들이 노동 과정에 대창을 부르는 형식으로 서로 마음에 드는 연인을 찾고 평생을 언약함을 말한다. 처녀는 총각이 마음에 들면 은팔찌나 가락지를 총각에게 선물하고 총각은 흰 배두렁이나 기타 진귀한 물품을 처녀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 뒤 남자 측이 주동적으로 여자 측에 매파를 보내 청혼하고 여자 측의 동의를 얻으면 떡이나 대추, 면, 돼지 족발, 빙금을 여자 측에 보내 혼인을 약정한다. 그리고 나면 처녀 총각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고 남자 측이 주동적으로 미혼녀 집에 가 논밭 갈이와 모내기, 추수를 돕고 결혼에 이른다. 하지만 봉건지주경제의 발전, 그리고 한족 혼인 관념의 영향을 받아 해방 전 써족 사회에서는 한 때 봉건매매혼인이 성행했다. 그러다 해방 후 봉건매매혼인이 사라지고 써족 청춘 남녀는 다시 자유연애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혼인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써족 사회에서 아들이 없는 가정은 데릴사위를 맞는다. 하여 아들을 가진 집 들에서는 아들을 데릴사위로 여자 측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 데릴 사위로 들어가 이루어진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며 만약 자식이 둘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을 각기 따를 수도 있다. 그리고 부부 모두 외동 자녀일 경우 결혼 후 첫 수년간은 양가 부모와 엇갈아 함께 살며 두루 돌보다 나중에 양측 부모 중 경제 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집에 자리를 잡는다.

출산 풍속:

써족은 예로부터 아들딸을 낳아 기르는 것을 아주 중히 여겼다. 임신한 여성은 비록 생산노동에는 계속 참가하나 마을 사람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중노동을 하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전 써족 여성들은 모두 시댁에서 분만했다. 해산 전에는 낮은 나무 걸상에 앉으며 시어머니나 산파가 조산했다. 써족은 ‘분만이 불결하다’고 여겨 하늘과 땅을 더럽혀 ‘신명’을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분만 시 한 묶음의 샛검불과 파지에 불을 붙여 방안의 액을 쫓곤 하였다. 또 임산부의 낡은 바지와 붉은 종이로 오린 바지를 문미에 붙여 액막이를 하는 것으로 아기의 순조로운 출산을 기원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와 임산부 모두 삼나무잎과 석창포 물에 몸을 씻는다. 탯줄을 끊은 아기에게 목욕을 시킨 뒤 남아이면 아버지의 낡은 옷에 감싸고 여아이면 어머니의 낡은 옷에 감싸 안는다. 또한 임산부와 아기는 한달 내에 석창포 물에 세안하고 목욕하며 발을 씻는다.

장례풍속:

써족은 토장을 행하며 뼈를 주어 다시 묻는 풍속이 있다. 써족의 장례 풍속을 본다면 관을 절벽 중턱에 있는 동굴 속 또는 돌틈에 두거나 절벽에 박은 말뚝 위에 두는 현관장과 화장이 위주였다. 써족의 시조로 알려진 반호의 장례가 현관장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써족의 화장에 대한 기록은 명나라의 일부 문헌에서 나타났다. 화장은 써족들의 빈번한 이주와 조상을 기리는 심리와 관계된다. 그들은 새롭게 이주한 곳에서도 조상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화장을 하면 골회의 체적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어서 휴대에 편리해 그들의 이 염원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써족은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화장에서 점차 토장을 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장도 한족들의 토장과 다소 달라 민족적 특색을 띠고 있다. 써족의 장례 풍속 중 가장 특이한 점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자들이 사망하면 입관 시 수의를 출가 시의 신부 옷으로 갈아 입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래로 울음을 대신’해 슬픈 노래를 불러 망자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것이다.

생활 예의 풍속:

써족은 손님을 맞이할 때 먼저 차를 권한다. 손님은 주인의 찻 잔을 받으면 반드시 두번째 잔까지 마셔야 한다. 만일 손님이 갈증이 아주 심하면 먼저 상황설명을 할 수 있으며 갈증이 가실 때까지 마실 수 있다. 집에 온 손님이 여성이면 주인은 해바라기와 낙화생, 닦은 콩 등을 권하기도 한다. 써족은 또 명절마다 먹는 특식이 다르다. 3월3에는 검은 쌀 밥을 먹고 청명에는 청명과를 먹으며 단오에는 쭝즈를 먹는다. 하지만 모든 명절에 반드시 먹는 음식도 있다. 바로 찹쌀 구이떡 츠바이다. 성인들이 생일을 쇨 경우 닭과 오리를 잡는 외 츠바도 굽는다. 그 외 써족의 혼례식에도 아주 재미나는 풍속이 있다. 혼례식 때 여자 집에서 보통 신랑을 위해 한 상을 차리는데 식사 시 신랑은 젓가락이 필요하면 ‘젓가락 노래’를 불러야 젓가락을 받을 수 있고 술을 마시려면 ‘주가’를 불러야 한다. 또 식사가 끝날 때면 식탁의 모든 물건들을 하나 하나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주방에 돌려보낸다.

금기사항:

출산 금기:

써족은 임산부의 침실을 마구 뒤지거나 침실에 못을 박는 것을 금한다. 태아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 임산부는 나무의 과일을 따지 않는다. 임산부가 과일을 따면 과일 나무에 과일이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산부는 오리 고기와 오리 알을 금식한다. 그것은 “7월 중순의 오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속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만월이 차지 않은 아기를 낯선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며 어린이가 홍역에 걸려 완쾌 한 뒤 수십여 일 간 개채를 먹이지 않는다.

교제 금기:

써족은 정월 초이레에 집 문을 나서면 정월 초 여드레에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신부가 처음 본가 집에 돌아올 경우 본가 집에서 잠자는 날짜가 절대 홀수가 돼서는 안된다.

노동 금기:

써족은 정월 초하루와 초닷새, 초아흐레에 똥 거름을 내지 않으며 정월 스무날에는 농삿일을 하지 않고 3월3에는 밭에 나가지 않으며 4월 초여드레에는 물소를 밭 갈이에 내보내지 않는다.

생활 금기:

써족은 정월 초닷새와 초아흐레에 넓은 공지에 옷을 널어 말리는 것을 금하며 부뚜막에서 개고기나 뱀 고기를 끓이지 않는다. 또 손수건을 선물하지 않고 길에서 다른 사람이 떨군 타올을 줍지 않는다. 그리고 홀수로 선물하는 것을 꺼리며 한 손으로 차를 손님에게 권하는 것을 삼가한다. 그 외 젓가락으로 고양이를 때리지 않는다.

제사 금기:

여성들이 가정을 대표해 제단에 향을 피우고 예배하는 것을 금하며 오리를 공물로 올리지 않고 사찰이나 석모, 수왕 앞에서 대소변을 보는 것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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