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앙족의 역사
명나라,청나라 때에도 금치는 계속 쇠락을 이어갔다. 더앙족들은 여러차례 따이족통치자들을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나 힘의 열세로 결국은 실패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날수밖에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초기 중국 경내의 더앙인들은 6천여명 정도였고 분산거주하는 형태였다. 대표적인 소집거, 대분산 형태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더앙족인구가적고분산거주하며거주지역의사회와경제발전이불균형한상황에근거해정부는더앙족지역에대한민주개혁을단행했다.보산,임창(臨滄)지역과덕굉주등지의더앙족은과거따이족토사에예속되었고따라서그정치경제구조가따이족과같았기에이들은따이족과마찬가지로평화적협상방식으로토지개혁을실시했다.그주요임무는봉건영주와지주소유제를철폐하고경작지를더앙족농민들에게배분해주어이들이경작지의진정한주인으로되게하는것이었다.얼마후이지역에서농업합작화가나타났다.덕굉주반산구(半山區)와원정진(畹町鎭)의더앙족이따이족토사와징퍼족관리들의통치를받아온점을감안해정부는이들에대해서는징퍼족과마찬가지로직접사회주의로과도하는방침을적용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당과 정부의 민족자치정책은 더앙족의 평등한 정치참여권리와 민족자치권리를 보장했다.
1953년7월덕굉따이족징퍼족자치구가설립되고1956년5월에는자치주로바뀌었다.그중더앙족대표가12명에달했다.1987년12월에로서시(潞西市)삼대산(三臺山)에전국의유일한더앙족단일향을내왔다.1988년3월에는임창지역의경마현(耿馬縣)에와족과라후족,리수족,더앙족을포함한군새(軍賽)민족향이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