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수족의 역사
리수족은 몽골인종 남아시아 유형에 속하는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민족언어는 한어-티베트어계 티베트미얀마 어족이족어 갈래에 속하며 문자는 신,구 리수문으로 나뉜다.
리수족은주로중국의운남성과티베트자치구가미얀마카친주와접경한지역의누강(怒江),그리고언메이카이강(이라와디강)유역에모여살고있다.그외중국운남의기타지역과인도동북부,태국과미얀마접경지역에도일부산재해있다.2010년제6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따르면중국경내의리수족총인구는126만명정도이다.
리수족은그들의자칭이자타칭이기도하다.리수족이란민족명은최초로당나라때저서에나타났다.당시번작(樊綽)은‘만서’(蛮書)에서리수족을리수(栗粟)라고호칭했으며그들이‘오만’(烏蛮)의한구성부분이라고여기고리수족이이족과나시족과관계가긴밀하다고적었다.명나라때에도리수를‘라라’(羅羅),이족의한갈래로분류했다.리수(傈僳)라는명칭은관련서적에서서로다른글자로표기는해왔으나1000여년전부터지금까지줄곧리수로불리워왔음을알수있다.
자자손손전해져내려온리수족의‘창세기’전설은대량산(大凉山)과소량산(小凉山)의이족,나시족,하니족의창세기전설과많은공통점이있다.이역시리수족이이족어갈래의여러민족과예로부터긴밀한친인척관계였음을설명한다.고대에하나의족원에뿌리를둔이들은기나긴역사발전과정에점차분화되어서로다른부락으로나뉘고차츰단일민족을형성했다.체질인류학차원으로본다면리수족은나시족,이족,하니족,라후족등고원민족의특징이있으며신장이길고콧마루가높고입술이얇으며눈이오목하게들어가남아시아어계의와족,부랑족,장족,따이족과는선명한차이가난다.이런차별점은이족어계여러민족이친인척관계이고공통점이있음을말해준다.누강지역의리수족은중화인민공화국건국초기까지씨족제도와토템숭배를이어왔다.리수족의몇몇씨족의명칭과토템숭배의형식이대량산과소량산이족씨족의명칭과토템제도와거의비슷하다.씨족은혈연친지관계에따라무어진그룹으로써본씨족성원이아니면같은명칭과토템을사용할수없다.때문에씨족성원들은모두공동의조상의후대임을공인한다.리수족에이족처럼호랑이,참대,물고기등씨족이존재하고서로의전설도비슷한점으로미루어보아이들이고대에긴밀한씨족혈통관계였음을유추할수있다.그리고동한과서한시기의‘수’(叟),‘휴’(巂)와동진,서진시기의‘동찬’(東爨),당나라때‘오만’에도리수족의선민이포함되어있다.하지만3세기이전까지통일된족칭이형성되지않았으며통일된조직도없었고다만크고작은부락에산재해있었다.
그러다당나라때리수라는명칭이처음사서‘만서’에등장했다.‘만서’는1200여년전리수족과나시족선민의지리적분포상황을비교적정확하게기술했는데이두민족을기타다른부락과구분시켰다.송나라때의문헌에는리수족관련기재가아주적다.그원인은북송이나라를세운후대도하이서지역을대리국관할지로묵인하고이지역에대한관리를거의하지않았기때문이다.14세기이후문헌과지방지에다시리수족관련기재가나타나기시작했다.당시의기록을본다면리수족을이족의한갈래로정의했으며리수족이수렵이나채집을위주로하며농업사회에들어서지않았다고적었다.16세기중엽에이르러서도대부분리수족은여전히수렵이나채집에의거했다.그들은금사강(金沙江)양안에살며려강(麗江)토지부목씨(土知府木氏)의통치를받았다.원나라와명나라때리수족선민은제1차,제2차대규모이주를진행해청해-티베트고원으로부터사천분지서쪽변두리를지나운귀고원북부에이주했으며주로사천과운남성의아롱(雅砻)강,금사강유역에정착해원나라와명나라의통치를받았다.16세기부터19세기까지려강목토사(木土司)와티베트지방정치그룹간세력권쟁탈싸움으로전쟁이빈발하자리수족은난창강을지나고설산을넘어차츰누강지역에이주했다.이주과정에리수족의거주지가부단히확장되었고기타민족과잡거하기도했다.19세기20년대청나라는리수족이분포한려강과영승(永勝),화평(華坪)등지에서토사를류관으로대체해이지역봉건영주경제를지주경제로탈바꿈시켰다.19세기말20세기초많은한족과바이족,나시족이이지역에진입하면서대량의철기농기구와선진적인생산기술을갖고왔다.그후리수족지역에도서방열강들이쳐들어와많은고통을안겨주었다.
장시기동안 광범한 리수족 인민은 본 민족과 기타 민족의 지주, 토사두목과 국민당, 제국주의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 통치계급과 제국주의 정치압박과 경제약탈은 리수족 인민들의 끊임없는 항쟁을 불러일으켰다.이들은 한족과 따이족, 징퍼족 등 각 족 인민들과 어깨 겯고 침략자들이 누강을 건느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인민해방군은 선후로 란평, 벽강, 누강 지역을 해방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리수족 사회의 발전은 비교적 느린 편이다. 20세기 50년대 민주개혁 전까지 리수족 사회는 일부 원시씨족 제도의 잔여형식을 보류하고 있었다. 또한 문자화된 법률도 없이 관습에 따라 사회를 영위해나갔다. 하지만 건국 후 국가법률법규를 전제로 각 마을마다 마을 규범에 따라 효과적인 관리를 해나가고 있다.
1957년중국은자체로창제한자모가없는구조가완전하지못한리수족의구리수문을폐지하고라틴자모를기반으로한신리수문을창제했다.한어-티베트어계티베트미얀마어족이족어갈래에속하는리수족의언어는비교적통일되어누강,녹권(祿劝)두방언으로나뉘지만사용하는어휘가거의비슷하여자유로운대화가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