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족의 역사
중국의 소수민족인 카자흐족은 그 인구가 약 160만명이다. 저 세계적으로 볼 때 카자흐족의 총 인구수는 1500만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 카자흐족은 주로 신강위구르자치구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문자는 아랍자로 카자흐문자이며 이는 카자흐스탄에서 사용하는 슬라브자모의 카자흐문자와는 다르다. 카자흐족은 카자흐스탄의 주체민족이기도 하다.
카자흐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다섯가지를 알아보자.
첫번째 설은 15세기에 이 이름이 출현했다는것이다. 시르하 하유지역의 일부 목축민들이 바르카스호 남쪽의 초하유역에로 이주했으며 이들이 통치자들의 억압을 피해 이주했다고 하여 “피난자”, “탈리자”라는 뜻인 “카자흐”라 칭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설은 “우순”과 대응하는 단어가 카자흐라는 것이다.
세번째 설은 카자흐가 바로 『당서』에 기재된 카싸 등과 대응하는 음이라는 것;
네번째 설은 돌궐인들이 칼이나 검과 같은 무기의 예리함을 형용할 때 “카자흐”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설은 카자흐족의 선조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 4세기까지 중아시아에 거주한 사카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카자흐족의 민족내원은 비교적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볼 때 고대의 오손과 강거, 아란인들이 중아시아초원의 사카인, 대월씨와 그후 이 지역에 진입한 흉노, 선비, 돌궐, 철륵, 거란, 몽골 등 여러 민족이 융합되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비교적 권위적인 분석이라 할수 있다. 13세기 초부터 몽골민족이 강대해졌고 15세기에 카자흐왕조가 세워지면서 연관이 있는 부락과 씨족들간에 연합이 한층 강화되었다. 카자흐족공동체의 최종적인 형성은 역사상의 “백장”칸국과 긴밀한 연관성을 보인다.
13세기 초, 징키스칸이 서쪽 지역을 정벌하니 우손과 극렬, 내만 등 부락들이 쫓겨서 더 서쪽으로 가게 된다. 몽골제국의 점령한 지역중에는 카자흐인의 유목지역도 있었다. 그후 몽골제국은 할거국면에 들어서고 현재 카자흐스탄 동부지역에 창건된 백장칸국이 14세기에 전반 지역을 통일하게 된다.
카자흐족의 조상들은 지역정권을 세운적이 있는데 역사상 이를 카자흐칸국이라 한다. 명나라 경태 7년(1456년), 백장칸국의 마지막 칸인 바라크의 아들 커레칸과 쟈니베크칸이 카자흐의 여러 부락을 인솔해 동쪽의 초하유역과 타라스하유역으로 이주하여 독립적인 정권인 카자흐왕국을 건립하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주변의 많은 유목부락의 사람들이 카자흐왕국에 합류했다. 당시 인구는 20만명이었다.
카자흐칸국이 세워진 후 카자흐 각 부락은 정치적으로 독립했고 그 경제발전이 신속했으며 따라서 칸국의 영토도 계속 확장되었다. 15세기 50년부터 70년대초까지 카자흐칸국은 친차초원과 중아시아의 일부 지역들을 통치했다. 16세기 20년대에 와서는 남쪽으로 시르하유역, 동남부는 칠하지역, 동북부는 바르카스호 동부와 남부지역을, 서부는 위세크하유역 등으로 판도를 크게 넓혔다. 1698년부터 1718년까지 카자흐족의 많은 부락들은 세개의 위츠로 나뉘어졌다. 즉 대위츠는 우부로, 중위츠는 좌부로, 소위츠는 서부로 그 영지가 나뉘어졌다.
17세기 말에는 서부 몽골의 즁갈부가 강대해져 대외확장을 진행했으며 때때로 카자흐칸국의 부락들을 침탈하군 했으며 이로 하여 카자흐칸국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카자흐족은 즁갈봉건귀족집단을 반대하는 힘든 항쟁을 진행했다.
18세기 중엽에 청정부가 즁갈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신강을 통일했으며 이때부터 서역의 여러 민족의 발전을 위한 양호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1766년에 청정부가 신강에 일리장군을 책봉하고 이곳에 이주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수용하도록 했다. 18세기 60년대부터 카자흐족들은 육속 자신들의 조상의 고향인 일리, 탑성, 알타이 세개 지역에 돌아와 유목생활에 종사했다. 이때부터 카자흐족과 내지의 경제, 문화교류가 날로 빈번해졌다.
신해혁명기간에 카자흐족은 신강의 여러 민족과 함께 청정부의 통치를 뒤엎었다. 신민주주의혁명기간 카자흐족은 한족 및 기타 민족과 함께 서로 지지하고 단결분투하여 신강에서의 국민당 반동통치를 뒤엎고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