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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군의 조선인 소대장은 왜서 실종되었을까

criPublished: 2016-03-11 14: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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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중국에는대륙을돌풍처럼휩쓴전쟁이일어난다.광동의국민정부가국민혁명군을주력으로삼아진행한통일전쟁이었다.훗날이전쟁은일명'북벌(北伐)전쟁'으로사책의한페이지를기록한다.

북벌전쟁에는여타의전사(戰史)처럼많은비사(秘事)가깃들어있다.조선인군인이북벌군에대량등장한이야기가그중의하나이다.약80년의세월에깊숙이침몰된이사실(史實)은전정혁(全正革)의다소격동된어조에실려서다시꿈처럼깨어나고있었다.

"저의 부친님이 바로 북벌군에서 보병소대 소대장으로 있었다고 하는데요."

1월의 찬 기운은 두꺼운 벽을 뚫고 집안까지 들어오기에는 아직 미력한 듯 했다. 인터뷰 장소인 북경 서부의 모 커피숍에는 얼음을 녹일 듯한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전정혁은 북벌군에 참가했던 부친과 관련한 인터뷰 요청을 수락하고 요녕성의 무순에서 일부러 상경했다. 실제상 전정혁 자신도 현지에서 이름 있는 민간사학자였다. 그는 가족의 뿌리 찾기는 물론 역사발굴의 차원에서 부친의 족적을 지난 몇 십 년 동안 집요하게 추적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전정혁부친의행적에는의문점이적지않게나타나고있었다.그래서기자는인터뷰직후남방모대학의교수최봉춘(崔鳳春)에게도움을요청했다.최봉춘은근․현대의관내조선인을전문연구하고있는사학자이다.

각설하고,전정혁의부친전병균(全秉均)은황포군관학교의제6기학생이었다고한다.전병균은6기생의신분으로북벌군에참가했다는것.황포군관학교졸업생은진정한의미에서는1기부터7기까지의학생을이르는말이다.

과연 중국 역사의 특필할 현장에 이처럼 조선인이 등장하고 있었던가. 그런데 더구나 기상천외할 비사들이 뒤미처 기억의 저쪽에서 유물처럼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었다.

명부에서 실종된 소대장

황포군관학교는국민당의창시자손중산(孫中山)이1924년5월광동성광주시황포구의장흥도에세운정치군사학교이다.학교는국민혁명을위해군관을훈련하는데취지를두었으며이런군관은나중에국민정부가발동한북벌전쟁의주요한군사력으로되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은 국민정부 산하의 군관학교와 국립대학에 조선인의 입학을 허락한다. 이때 교장판공실 비서 겸 교관으로 있던 손두환이라고 하는 조선인이 장개석과 직접 교섭하여 조선인의 황포군관학교 입학에 많이 이바지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비롯한 경찰서류에 많이 반영되고 있다.

지금까지밝혀진문헌내용에따르면조선인들은일찍황포군관학교제3기부터입학하기시작했다.조선인학생은이때부터1949년의제22기까지황포군관학교에나타나고있다.그렇다고해서기마다다조선인이있은건아니라고최봉춘이지적했다.그는《황포군관학교동학록(同學彔)》의기록을인용,제3기5명,제4기32명,제5기6명,제6기1총대와2총대11명등도합14기의96명조선인졸업생이름이검색된다고소상하게설명했다.

그러나 자칭 6기생이라고 하는 전병균의 이름은 《황포군관학교 동학록》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헌기록에따르면황포군관학교제6기1총대(總隊)는1928년4월부터1929년5월까지남경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훈련을받았고2총대는1926년10월부터1929년2월까지광주황포군관학교에서훈련을받았다.잠깐,이가운데서제6기학생들의일부는북벌군을따라무한에간후1927년설립된황포군관학교무한분교제6기로재편성되었다.

최봉춘은 전병균의 자필이력서(1954)에 근거한 그의 추론을 이렇게 피력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전병균은 제6기(제2총대)에서 재학할 당시 소대장 자격으로 북벌전쟁에 투신하고 무한에 도착한 후 무한분교 제6기에 재편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병균은 1927년 7월 중순까지 무한에서 훈련을 받다가 광주로 남하하여 연말의 광주기의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황포군관학교 동학록》에 등록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 더구나 동학록은 졸업 1년 후 조사하여 편제하는 게 관례였으며, 이런저런 원인으로 상기 명부에 수록되지 못한 학생은 적지 않았다.

실제로전병균처럼자칭제6기예비생또는제4기생이라고하는조선인최정무(崔鼎武)도그이름이명부에기록되지않고있다.최정무는《중국의광활한대지위에》라는제하의실록에나오는인물이다.

어찌됐거나 전병균이 북벌전쟁의 과정에서 소대장으로 있었다고 하는 이력서의 서술에 대해 최봉춘은 전적인 수긍을 하고 있었다.

"그때 국민혁명군에는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군사인재가 극히 드물었지요."

군관학교의 졸업생은 물론 학생들까지 초급 군관의 계급으로 북벌에 투입되었다. 전병균 등 조선인들은 국민혁명군 각 군단에 배속되어 있었다. 비록 구체적인 숫자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이 조선인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라기보다는 학생병사가 대부분이었다.

와중에국민혁명군제4군단엽정(葉挺)독립연대제3대대는대대장이양림(楊林)이었다.양림은황포군관학교전교관이었으며조선인이었다.이런연고로3대대에는기타부대보다조선인이더많이집결되었을수있었다는얘기가된다.

엽정독립연대는 1926년 5월 선견부대로 되어 북쪽의 호남에 진군했다. 전병균의 북벌참가 시점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 이에 따라 전병균의 북벌군 소속부대 명칭에 씌워진 베일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다.

집단 실종된 조선인 군인들

전병균은길림성유하현의동명(東明)학교에서교원으로있을때남방의광주에곧군관학교가설립된다는소식을접했다고한다.동명학교는이름그대로'동쪽을밝히는학교'라는의미로반일독립사상을선전하던학교였다.전병균이동명학교에이어교직에있은요녕성신빈현의영영촌(英盈村)소학교역시반일독립단체가세운학교였다.

이에 앞서 전병균은 고향인 조선 평안북도의 선천읍 중학교에서 공부할 때 14살의 어린 나이에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경찰의 조사를 피해 도주하다시피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부모와 함께 행장을 내려놓은 요녕성 신빈현에는 조선독립군의 일원인 삼촌의 가족이 이미 전에 이주하여 삶의 새 터전을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병균은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황포군관학교의 입학을 작심한 게 아니었다.

이력서에따르면전병균은광주행경유지인상해에서학우김득수(金得洙)를만난다.김득수는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의성원이었다.운명처럼때마침만난인물이었다.전병균은김득수로부터광주의중산대학에있는그의지인유상우(劉相禹)를소개받는다.1926년의《국립중산대학학생명부》에따르면이무렵약50명의조선인청년들이중산대학본과와예과에서공부를하고있었다.

유상우의 주선을 받아 전병균은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양림을 만나며 그의 알선으로 시험을 본 후 황포군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그시기전병균이나유상우,양림처럼광주에집결한조선인은300여명에달했다고전한다.여기에는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광동군사비행학교의재학생과교직원그리고군대에편입된조선인이망라되고있었다고최봉춘은그의연구결과에근거하여밝힌다.또조선인은이보다훨씬많은800여명에달했다는설이있다.님웨일즈는일대기《아리랑》(1937)에서주인공인조선혁명가김산(金山)의회억을인용하여이렇게소개하고있다.

미상불광주는국민정부의수부가소재한곳으로,조선인들이자유와독립의길을모색하고활동하는마당으로되고있었다.1926년말,국민정부가무한으로천도(遷都)하면서뒤미처무한역시조선인들의또하나의집거지로거듭나는것이다.

이야기가 그만 다른 데로 잠시 흘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국민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서적과 숙소, 식비, 복장, 봉급을 제공받을 수 있었으며 대신 졸업 후 일정 기간 국민혁명군에 의무적으로 복역해야 했다. 최봉춘은 그의 연구에 토대하여 이 기간을 몇 달 또는 1년 이내라고 추론하고 있었다. 아무튼 전병균 등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북벌군에 편입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927년7월,국공분열후황포군관학교무한분교는문을닫게된다.이때또다수의조선인청년들이무한조선인청년회에의해제6기생으로재학하고있었다.이들무한분교의일부학생은엽정(葉挺),하룡(賀龍)의부대에편입되고다른일부학생은장발규張發奎부대의교도(敎導)연대에편입,재편성된후남하하여광주에간다.교도연대에는약100여명의조선인이편입되었으며,전병균도여기에포함된걸로최봉춘은분석하고있었다.

"콕 집어서 '교도연대 2대대 5중대는 150명의 조선인들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기의가 발발한다. 광주기의는 남창기의(1927.8)와 추수기의(1927.9)를 이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우파에 반항하여 일으킨 또 한 차례의 반격이었다.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무장력인 교도연대는 기의의 주력군이었다. 전병균은 이력서에 그의 소속 부대가 광주기의의 3박3일의 전투 끝에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때기의군에있던조선인군인들은막심한피해를입은것으로보인다.광주정부는1964년광주기의열사능원에《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설립하는데,이기념비의낙관은당시기의군의핵심지휘관이었던엽검영葉劍英이다.비문은150여명의조선(인)청년들이광주기의에서희생되었다고적고있다.교도연대에편입되었다고하는조선인의거의전부혹은그이상에해당하는숫자이다.

군복을 벗은 군인의 이야기

그때 전병균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간신히 끌고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그의 광주의 선착지였던 중산대학은 피신지를 찾는 마지막 한 올의 희망으로 되고 있었다.

다행히학교를수위하던진(陳)씨성의노인이전병균을학교의지하실에3일동안숨겨줬다.이고마운노인은미리전부터면목을알던사람인지또기의를동정하던사람인지를전병균의이력서의짧은서술에만의거해서는알수없다.아무튼진씨의도움으로전병균은홍콩으로가며이곳에서여객선을타고상해로향발한다.

이때가1928년1월경이었다.전병균은상해에서조선혁명가여운형(呂運亨)을만나며그의집에한동안은신한다.이기간전병균은여운형과얼굴을맞대고향후의진로를논의했다고이력서에기술하고있다.

여운형은 중국공산당 상해 조선인지부의 지도자로, 공산당 계열의 조선인 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추천한 인물이다.

전병균의 이 상해행은 우연이 아니었다. 광주기의가 실패한 후 생존한 많은 기의 인원들은 상해 등 지역에 피신했다. 대도시 상해는 엄청난 시멘트의 수림에 각양각색의 인물을 새의 무리처럼 자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암만 그러더라도 상해는 필경 국민당 '백색테러'의 공포에 뒤덮여 있는 곳이었지요." 최봉춘은 은신한 사람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상해에 피신했던 광주기의 인원들은 나중에 여러 곳으로 각기 흩어집니다."

그때 조선인들의 일부는 강서성 서금의 소비에트구로 갔고 일부는 만주에 가서 항일조직에 참가했다.

전병균은남만주의신빈행을선택했다.그무렵신빈에는'남만청년연맹','북만청년총동맹','국민부'등반일독립단체가활약하고있었다.에피소드라고할까,이때또하나의거물이전병균의앞에나타난다.국민부의양세봉(梁世奉)이그를소속단체에편입시키고자찾아왔던것.양세봉은훗날조선혁명군사령관을담임했던항일명장이다.

전병균은 종국적으로 '북만청년 총동맹'에 참가하여 신빈 지부서기를 담임한다. 그러나 얼마 후 우여곡절 끝에 신빈을 떠나게 된다.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그는 북쪽의 치치할과 중북부의 북경, 다시 북쪽의 할빈, 심양과 중부의 서주 등 지역을 전전한다. 선후로 차 기사, 병원 도우미, 상회 직원 등으로 있었고 한때는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생활을 했다.

광복(8.15)이 나면서 출옥한 전병균은 북경에서 조선인 귀국운동에 참여하다가 광복군 제3지대에 의해 또 한 번 구금된다. 실은 귀국운동이 아닌 공산주의자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이때 전병균은 동생이 마침 광복군 제3지대에 가입한 덕분으로 20일 만에 겨우 풀려났다고 한다.

소설 같은 이런 풍파는 그저 소설로 만들어지고 있는 듯 했다. 이 시기 전병균은 대부분 생계를 잇기 위한 생활을 연속하고 있었으며, 한때 꿈처럼 동경했던 군인 생활은 허공에 날린 연처럼 그의 세계를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광복을 맞은 이듬해라고 해요. 부친님은 조선인의 귀국열차에 올랐지만 도중에 신빈현에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정혁은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회억했다.

그때 전병균은 나이 마흔을 넘는 노총각이었다. 어서 장가를 들라는 어머니의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동안 부모에게 별로 효도를 하지 못했던 전병균은 이번에는 순순히 그 분부를 따랐다.

군관학교 옛 교관의 천안문의 친견

1947년, 신빈현이 해방된 후 전병균은 신빈현 조선인 교무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된다. 그는 민족교육의 부흥에 앞장을 서서 조선인 군중들과 함께 20개의 조선족소학교를 복구, 창립했다. 공화국이 창건된 이듬해인 1950년 전병균은 신빈현 총공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며 이어 선후로 신빈현 인민위원회 위원과 인민대표, 요녕성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미구에 소설 같은 일은 정말로 현실로 나타난다. 전병균은 북경에서 황포군관학교의 옛 교관, 북벌군의 옛 지휘관과 장장 30년 만의 상봉을 하는 것이다.

1956년,전병균은천안문성루에올라모택동(毛澤東),유소기(劉少奇)등당과국가지도자의친견을받으며기념촬영을했다.이장소에서황포군관학교정치부주임이었던주은래(周恩來)총리를다시만났다.황포군관학교교관부(敎官部)주임이었던이제심(李濟深)도정부부주석으로공화국국가지도자의행렬에서있었다.북벌군의유명한지휘관이었던하룡(賀龍)원수도또지척에서만날수있었다.

이때 옛 교관과 학생, 옛 장령과 하급 군관의 만남의 대화가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걸 떠나서 전병균의 어깨에는 더는 군 계급장이 얹혀 있지 않았다. 전병균은 동북소수민족 참관단 일원의 신분으로 천안문에 올랐으며, 군부대가 아니라 신빈현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개 과장급 직원이었다.

비록 황포군관학교와 북벌군 경력은 단 1, 2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전병균의 일대기에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기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신빈현에는 '반혁명분자' 전병균을 폭로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고 한다. 황포군관학교와 북벌전쟁은 필경 국민당이 주도한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 시절 극좌적인 운동의 배경에서 황포군관학교 학생과 북벌전쟁에 참여한 군인은 모두 '반혁명분자'로 점철되고 있었다.

종국적으로 '대자보' 사건은 "민족인사는 투쟁하지 말라"고 하는 상부의 지시로 하여 유야무야하게 처리되었다. 그럴지라도 전병균은 지병으로 사망한 1967년까지 애당초 옛날의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꺼려했다고 한다.

"당신의 옛 경력이 우리 가족에게 그 무슨 누라도 끼칠까 두려워했던 거지요." 전정혁의 슬픔 어린 말이다.

결국전병균은자식들에게도전모(全貌)를그리기힘든희미한인물로되었다.그때그시절의풍운은역사의많은사건의중심에서있었고또근․현대의많은명인들을신변에서만났던이인물을더는찾기어려운미스터리의'실종자'로만들고있었던것이다.*

글: 김호림/사진제공: 전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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