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

양류청(杨柳青)년화(年画):단청묘필의아름다움

criPublished: 2015-07-17 13:12:20
Share
Share this with Close
Messenger Pinterest LinkedIn

양류청 년화의 시작은 명나라 숭정 시기로 청나라 옹정, 건륭시기부터 광서 초년까지 부흥기였는데 그때 당시에 천진 양류청과 인근 마을 36개 촌에서도 거의 모든 집에서 년화를 창작했고 년화 그리기를 주요직업으로 했다.

양류청에서"집집마다그림을잘그린다"고소문이난년화산지로잘알려져전국각지에서온상인들의발걸음이끊이지않고그야말로명실상부한그림의고향이었다.그렇게양류청의년화가발전을거듭하면서번성일로를달릴때제2차아편전쟁으로양류청의년화는쇠퇴의길로들어섰다.그러다1926년,곽파오세(霍派五世)의후계자곽옥당(霍玉棠)이양류청의가장큰화당인"옥성호"(玉成号)를창립하면서양류청년화는그원기를회복되기시작했다.해방이후,주은래총리는직접화당에친히와서시찰하고화당에필요한등황원료까지보내줬다.현재남아있는초기년화는매우적으며현재볼수있는양류청년화의대다수는명말청초가경,도광시대의우수한작품들이다.

[옥성호화당]

[옥성호화당 주인이 년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양류청 년화의 예술적 특징은 다방면적이며 형성된 예술특징의 조건 역시 다방면적이다. 그 중 비교적 눈에 띄는 것은 제작에서 나타난다. 양류청 세화의 제작 과정은 대략 밑그림, 판 나누기, 조각, 인쇄, 채색, 표장인데 전기 때의 순서는 다른 여느 목판 년화와 비슷한데 모두 밑그림을 바탕으로 조각하여 인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류청 년화의 후기 제작방법은 오히려 더욱 복잡하며 많은 기법을 사용하고 또한 세밀한 선이 가는 방식과 굵고 호탕한 느낌의 굵은 선 방식이 있어 다른 지방의 년화의 예술풍격과 확연히 다르다.

[년화 장인이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首页上一页12345全文 5 下一页

Share this story on

Messenger Pinterest Linked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