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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징강산 정신, 작은 불씨가 넓은 들판을 태우다

criPublished: 2021-06-30 18: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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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중국공산당창당100주년이되는해이다.백년의발전을거쳐중국공산당은9천여만명의당원을거느린큰정당으로성장하면서많은어려움을겪었고그런과정에공산당의정신세계를풍부히하는많은정신을형성했다.그중하나가바로징강산(井岡山)정신이다.

1927년국민당(國民黨)과공산당(共産黨)간제1차협력이파열되면서많은공산당인이학살당하고공농(工農)운동의불길도사그라졌다.국민당의총대앞에서공산당은혁명의무장으로반혁명의무장에맞서야함을깨닫고국민당의세력이집중된도시를상대로난창(南昌)봉기와추수(秋收)봉기,광저우(廣州)봉기등100여회의크고작은무장봉기를일으켰으나실패로돌아간다.

그해10월마오쩌둥(毛澤東)이추수봉기군을이끌고징강산에올랐다.숲이울창하고산발이기복을이루는징강산은천혜의병풍처럼수비하기는쉬워도공격하기는어려운지형을가지고있었다.마오쩌둥은이곳을근거지로하고혁명의구심점을농촌으로옮기기로했다.

이듬해4월주더(朱德)의난창봉기군,천이(陳義)의샹난(向南)봉기군이징강산에도착해마오쩌둥과승리적으로합류했다.마오쩌둥의군대와주더의군대를공농혁명군제4군으로재편하면서징강산의혁명무장력은점차장대해져한점한점의작은불꽃이넓은들판을태울기세를보였다.

징강산은 넓은 흉금으로 많은 혁명의 아들딸을 받아 들였고 혁명의 아들딸들은 이 곳 혁명의 요람에서 피 흘려 싸웠다. 2년 4개월 동안의 징강산 혁명투쟁에서 희생된 4만 8천명의 열사는 징강산의 푸른 숲으로, 불타는 두견화가 되어 징강산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했으며, 징강산은 “신념을 다지고 간고분투하며, 실사구시적이고 새로운 길을 탐구하며, 대중에 의지해 용감하게 승리로 향하는” 공산당의 정신을 영원히 새기고 있다.

신념을 다지고 간고분투하는 것은 징강산 정신의 영혼이다. 징강산 혁명의 불씨가 중국 전역에 혁명의 불길을 지피고 승리로 향할 수 있은 것은 혁명가들이 확고한 공산주의 이상과 시종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확고한 신념과 간고분투의 정신이 있었기에 공산당인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와 의지로 백색의 테러 속에서도 끝까지 혁명을 견지했으며 그로부터 한 점 한 점의 불씨가 넓은 들을 태우는 행동이 따르게 되었다.

국민당의 봉쇄로 인해 당시 징강산의 여건은 아주 열악했고 홍군의 생활은 아주 어려웠다. 식량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소금과 생활용품도 극히 적었다. 하지만 홍군은 강한 의지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적들의 포위 속에서 근거지를 지키고 혁명의 불씨를 뿌렸다. 그들은 이런 불씨가 넓은 들판을 태울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용기와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실사구시적이고 새로운 길을 탐구하는 것은 징강산 정신의 핵심이다. 징강산의 투쟁은 중국혁명의 저조기에 시작되었고 관건적인 이 시기에 마오쩌둥을 대표로 하는 공산당인들은 중국의 실지상황에 근거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인 실천을 접목해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혁명의 길을 개척했다. 이는 혁신이었고 이 혁신은 근거 없는 혁신이 아니라 중국의 실제상황에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 혁명 학설에 대한 창조적인 전환이었다.

근거지를 세우고 혁명의 길을 개척한 후 감안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근거지를 확대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적들의 포위토벌에 맞서 홍군은 어느 한 가지 군사사상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실지상황에 근거해 유연한 전술을 제정했다. “적이 들어오면 나는 물러서고, 적이 물러서면 내가 공격하며”, “대중을 동원해 집중적으로 적을 공격하는” 등 이런 전술 원칙은 그 어떤 병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공산당인들이 적군과 아군의 세력, 그리고 실지상황에 근거해 창조한 것이다.

대중에 의지해 용감하게 승리로 향하는 것은 인생관과 가치관에서 보여준 징강산 정신의 구현이다. 대중은 전쟁의 근본이고 전쟁승리의 원천이다. 대중의 지지는 홍색정권이 수립, 존속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고 농공무장 할거의 기본 여건 중 하나는 바로 대중적 기반이었다. 징강산 투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대중들과 피로 맺은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군대는 백성을 아끼고 군대내부에서는 장병이 일률로 평등했다. 홍군은 또 토지혁명을 통해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으며 백성들의 민생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주었다. 이런 민주주의 적이고 평등하며 백성을 억압하지 않는 환경에서 징강산의 농민들은 홍군을 무서워하던 데로부터 진심으로 홍군을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생명을 무릅쓰고 홍군을 후원했고 너도 나도 홍군의 일원이 되겠다고 나섰다. 징강산의 군대와 백성은 한 마음이 되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면서 적들의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포위토벌을 격퇴시켰다.

징강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르는 혁명의 발자취가 남아 있고, 사서에 기록된 징강산 정신은 자자손손 대를 이어 앞으로 나아가도록 공산당인들을 격려한다.

출처: 조선어부 논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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