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위관지(嘆爲觀止)
◎글자풀이: 탄식할 탄(嘆tàn), 하 위(爲wéi), 볼 관(觀guān), 그칠 지(止zhǐ).
◎뜻풀이: ①감탄해 마지 않다. ②더할나위 없다. ③아주 훌륭하다.
◎출전: 춘추•로(春秋•魯) 좌구명(左丘明)『좌전•양공29년(左傳•襄公二十九年)』
◎유래: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에게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제번(諸樊), 여제(餘祭), 여매(餘昧), 계찰(季札)이다. 오왕이 임종에 앞서 네명의 아들을 불러 후사를 정해 주었다. 수몽은 막내아들 계찰이 제일 현명하다고 여겨 군주의 보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이 이를 사양했다. 이에 수몽은 네명의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잇게 하고 계찰이 마지막 순서로 왕위를 잇도록 유언을 했다.
수몽이 죽은 후 제번이 13년간 왕위에 있다가 죽었고 이어 여제가 17년간 왕으로 있다가 암살을 당했다. 이어 셋째인 여매가 왕위에 올라 계찰을 재상으로 삼았다. 계찰은 무력사용을 중지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했으며 제(齊)나라와 진(晉)나라 등 중원의 제후국들과 화목하게 지낼 것을 제안했다. 여매가 이를 받아들여 계찰을 노(魯), 제, 위(魏) , 진 등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기원전 544년에 계찰이 노나라에 도착해 세세대대로 화목하게 지낼 의향을 밝혔다. 노나라 군신이 이를 기쁘게 받아 들였고 “무악(舞樂)”으로 계찰을 초대했다. 노나라는 주공의 맏아들의 영지였던 관계로 주천자(周天子)의 예악(禮樂)을 사용해 왔다. 악공이 먼저 『주남(周南)』, 『소남(召南)』을 연주했는데 그 노래와 춤이 정채롭기 그지 없었다. 음악과 무용에 정통한 계찰은 이를 흠상하면서 한편으로는 평가를 했다. “이 두 악곡은 매우 훌륭하기는 하나 상주(商紂)의 분위기가 섞여 있어 완벽하다고 할수 없으며 백성들이 힘들지만 원망하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어 악공이 『회풍(檜風)』, 『조풍(曹風)』을 연주하니 계찰은 여러 나라의 민간음악에 대해 평가했다. 그는 이런 음악들이 주나라 황실의 쇠락과 제나라의 부흥, 진나라의 강성함 등 정치적인 징조를 나타낸다고 분석했다. 『정성(鄭聲)』과 『당풍(唐風)』을 듣고는 정풍의 방탕함과 당풍의 소박함을 지적했다.
이어서 『소아(小雅)』,『대아(大雅)』,『주송(周頌)』,『노송(魯頌)』, 『상송(商頌)』등이 연주되었다. 계찰은 이런 가무가 대개는 성인(聖人)들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린 내용을 담은 것이라 인정했다. 이어『소소(韶箾』연주가 시작되자 계찰은 이 곡이 “순악(舜樂)”임을 알고는 오늘의 끝곡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노나라가 천자의 음악을 사용하지만 4대 까지만 사용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주나라부터 순(舜)의 시대까지 소급하면 바로 4대였으니 『소소』가 마지막 곡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소소』가 끝나자 계찰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무악은 정말 완벽합니다. 여기까지 보기로 하지요. 그전 조대를 거슬러가면 요악
노나라 군신들은 계찰의 박학다식함에 크게 탄복했고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번 일을 사서에 기재했고 “탄위관지”라는 단어도 이때부터 전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