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간 절벽에 1만미터 인공 “은하수” 만들어낸 사람--황대발(黃大發)

2017-04-18 15:11:30 CRI

36년간 13140여일, 이 기간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일들을 이루어낼수 있지만 중국 서부 준의(遵義)시 파주구(播州區)평정흘료(仡佬)족향 단결촌의 황대발(黃大發)씨는 한가지 일, 바로 300미터 높이 절벽에 만여미터의 인공도랑을 만드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봄갈이 시즌에 들어서자 준의시 파주구 평정홀료향 단결촌은 바쁜 모습입니다.

촌민 서국태(徐國太)씨는 논가의 저수지에서 물을 뽑아 방금 자라난 모종에 물을 주었습니다.

"논에는 곡식을 심고 고기를 양식하고 있습니다. 올해 물고기 산량이 2천여근에 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눈앞의 광경에 서국태 씨는 감개무량해 했습니다.

"과거 우리 이 곳에서는 '옥수수에 목이 막히고 섣달 그믐날밤에만 이밥 구경을 하네'라는 말이 유행이었습니다."

서국태 씨가 말하는 '과거'는 1995년 전입니다. 그때 현지 조건으로는 옥수수 재배만 가능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매일 주식이 옥수수였고 설날 때만 쌀을 조금 장만해 집안 어른들께 대접했으며 일부 집에서는 쌀로 죽을 써서 대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난은 단결촌 촌민들이 시시각각 직면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년간 빈곤을 퇴치하지 못한 원인은 산이 많고 땅이 적고 자연조건이 열악한 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수자원 결핍이었습니다. 이로인해 마을사람들은 늘 물다툼했습니다.

촌민 황빈개(黃彬凱)씨의 말입니다.

"날씨가 건조해서 모두들 물다툼을 했죠. 물이 차례지지 않으면 싸움을 벌였죠. 이 곳은 마누라찾기가 어려워 홀아비가 많았습니다. 모두 우리 이곳은 항상 가뭄이 들어 물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서광은 50여년 전인 1959년에 나타났습니다. 그해 황대발(黃大發)씨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촌간부로 선거됐고 인공도랑 건설은 취임 후 황대발 씨의 첫 구상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절 믿어줬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몇가지 일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우선 가난하고 물이 부족하니까 물길을 내려고 생각했죠."

물길을 내려 생각한 사람은 황대발 씨 전에도 있었습니다. 사실 수원(水源)은 단결촌과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물을 마을까지 끌어오려면 도랑을 만들어야 하고 큰산을 3개 넘어야 했으며 300미터 높이에 길이 400미터나 되는 벼랑이 세곳이나 있었습니다. 수백년간 마을 사람들은 벼랑보고 한탄만 하면서 하늘에 신세를 맡기는 식으로 가난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황대발 씨는 마을사람들을 인솔해 진정으로 도랑내기에 나선 1인자입니다. 측량은 참대를 이용해 눈잡이로 했고 시멘트가 없으면 진흙으로 대체했습니다. 기술을 몰랐기 때문에 홍수가 범람하면 방금 수건한 도랑은 물쌀에 밀려 어수선해졌습니다. 이렇게 십여년간 고생했지만 단결촌으로 물을 끌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물길을 내는데 수십년간 걸렸지만 물을 끌어오지 못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더는 도랑만들기를 지지하지 않았고 황대발 씨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줄곧 황대발 씨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한 황대발 씨는 도랑을 내려면 우선 기술이 있어야 함을 터득하고 53살에 수력발전소로 전근한 후 3년간 대량의 도랑만들기 지식을 쌓았습니다.

56살에 다시 단결촌으로 온 황대발 씨는 인공도랑 건설에 재도전했습니다. 자금이 필요해 마을사람들을 동원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자아냈습니다.

하여 황대발 씨는 모금하기 위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질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는 마을사람들이라 도랑건설공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울러 현지정부에서도 자금과 기술적인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비록 수십년이 지났지만 도랑내는 일은 여전히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공사에 참여한 촌민 왕정명(王正明)은 신념이 없다면 이 도랑은 낼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함께 3년간 꾸준히 노력한 결과 인공도랑 건설에 성공했고 단결촌에 물길이 통했습니다.

물이 통하자 단결촌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뭄에 시달리던 땅이 수전으로 변했고 촌민들은 더 이상 쌀걱정, 마누라 걱정을 하지 않고 재배업과 양식업 등 치부산업을 일구었고 마을의 어린이들은 안심하고 공부하게 됐습니다. 하여 백여세대되는 마을에서 30여명 대학생이 배출됐습니다.

황대발 씨는 물이 통했으니 이젠 중등권 수준의 생활을 실현하기 위해 분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갈수록 좋은 삶을 누리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도랑을 "대발거(渠)"라고 명명했습니다.

올해 81세인 황대발 씨는 가끔씩 도랑을 찾군 합니다.

그 뒤로는 생기로 차넘치고 녹색 단장을 한 다락밭이 펼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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