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녕하회족자치구 설립 60주년 ) 중국 녕하 주민들, 아름다운 삶에 엄지 척!

2018-09-21 09:28:45 CRI

1958년 10월 25일, 녕하회족자치구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지난 60년간 녕하 여러 민족 인민들은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노력으로 황량한 사막을 오아시스로 변모시켰으며 공업의 무에서 유를 실현하고 석탄화학공업을 주체로, 여러 가지 신형 산업을 함께 추진하는 발전의 새 국면을 열었다. 지난 60년간 녕하의 발전과 변화에 대해 이 곳 주민들은 너도나도 엄지를 내들고 있다.

녕하회족자치구 은천시(銀川市) 서남부에 위치한 하란산(賀蘭山) 기슭에는 민녕진(閩寧鎭)으로 불리는 향진이 있다. 20 여년전 이곳은 녕하 서해(西海)의 가물고 물이 부족한 지역으로 꼽혔으며 주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가난했다. 해국보(海國寶) 민녕진 원륭촌(原隆村) 촌민은 그 시절을 이렇게 떠올린다.

"이 곳은 고향의 동굴집입니다. 네 식구가 어두컴컴한 동굴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안쪽의 동굴에는 알곡을 저장했는데 일년가야 몇주머니 되지 않았습니다. 생활하고 먹고, 소비하는 돈 모두가 몇주머니 되지 않는 알곡에 의거해야 했습니다."

1996년, 중국공산당 복건성 위원회 부서기였던 습근평 동지가 복건의 녕하 가난구제 지도소조 조장을 맡았다. 두번째 해 습근평 동지는 녕하에서 조사연구 시 복건과 녕하의 약칭으로 명명된 이민 개발구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민녕촌"의 이름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22년의 발전을 거쳐 민녕촌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던 빈곤한 모래톱으로부터 알곡이 넘쳐나는 민녕진으로 탈바꿈했다. 진 농민들의 연간 수입도 이개축 이전의 인민폐 500원으로부터 지금은 1만 여원으로 늘어 전국 동서부 가난구제 협력의 시범으로 되었다. 해국보 촌민은 현재 아들과 며느리가 모두 진의 기업에서 출근하고 있는데 월수입이 7천여원에 달해 생활이 크게 펴이었다고 말한다.

민녕진의 변화는 중국 인민이 녕하의 제반사업을 지원한 하나의 축소판이라 할수 있다. 자치구 설립후 전국각지에서 공업과 농업, 교육, 보건 등 각 영역의 인재들이 대거 녕하에 모여 열정과 땀방울, 심혈과 청춘을 이곳에 고스란히 바쳤다. 이들의 노력으로 녕하의 도시와 농촌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1958년 12월, 왕덕련(王德連) 씨는 신청과 심사를 거친 뒤 그와 함께 근무하던 근로자 40명과 함께 하북성(河北省) 장가구시(張家口市)의 석탄기계공장으로부터 녕하에 와 석취산(石嘴山) 광무국 기계수리공장을 세우면서 녕하 공업의 제1세대 건설자로 되었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석취산에는 현지인이 별로 없고 대부분 녕하를 지원하러 온 외지인들이었습니다. 그때는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올해 80세 고령인 왕덕련 씨는 이제 진정한 '토박이' 녕하사람이 되었다. 그의 아들 딸과 손자손녀들은 녕하라는 이곳 황토지에 뿌리를 내렸다.

"지금 이곳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변화했습니다. 대무구(大武口)와 석취산에는 지금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넓은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이흥화원(怡興花園)으로부터 삼림공원쪽으로 걸어가면 양켠에 늘어선 나무가 그늘을 마련해주어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서늘합니다. "

지난 60년간 녕하의 경제사회발전이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서수매(徐秀梅) 녕하회족자치구 통계국 국장이 말한다.

"자치구 설립 60년간 녕하의 경제사회발전에 강대한 동력과 활력이 주입됐습니다. 경제 규모가 작던 데로부터 커졌으며 경제실력도 약하던 데로부터 강해졌습니다. 1958년 녕하시 지역 총생산은 3억 2800만원이었지만 2017년에는 1958년의 1053배에 달하는 3453억 9300만원을 기록했습니다. 60년 동안 연 평균 성장률은 9.4%로 전국 동기 경제성장률인 8.0%를 초월했습니다."

번역/편집:강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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