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이야기] 아픔에 주저앉으면 끝이다(한 설)

2017-04-19 09:17:57 CRI
설중매(자료사진)

한알의 씨앗은 땅속에서 썩는 아픔으로 파릇한 새싹으로 변신을 한다. 한그루의 나무는 마디마다 성장통을 앓고 투박한 옹이를 남기며 단단해지고 비바람속에서 거목으로 탈바꿈한다. 우리의 인생도 지구라는 별에 와서 엄마자궁의 하나의 작은 세포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아픔을 겪으며 성장한다. 아프니까 성장할수 밖에 없는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가?

요즘 나는 자신의 더하기와 빼기 인생을 명상으로 되새겨본다. 부모님이 준 생명으로 여섯식구인 삼대가족을 이끌고 살았었는데 빼기에 능하다고나 해야 할가, 지금은 홀로 인생이 되였다. 상실과 아픔을 겪으면서 절망이란 색채를 다시한번 깊이 있게 느껴보게 되였다.

철 없던 어린시절에는 세상이 황홀하기만 했고 욕심도 많고 꿈도 컸다. 가야하에 발목 담그며 내 고향에 구름다리를 놓고 채색종이가 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종이도시로 만들 꿈을 꾸었다.

나의 동년시절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것이였다. “공부무용론”이 성행하던 때에도 지식이 있어야 바르게 산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나에게 씨앗이 되여 열심히 지식을 습득한 끝에 나는 끝내 교원의 꿈을 이루었다. 학생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치는 일이 너무나도 성수났다. 돈벌이유혹때문에 학교를 떠나는 동료들이 날로 늘어나는것을 보면서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교단에서 내려올수가 없었다.

가정의 풍파에 쓰러졌다가도 간신히 일어날수 있은것은 내가 우리 글을 사랑하고 문학을 좋아했기때문이였다. 나는 중매결혼하고 딸애가 태여난지 열달만에 리혼이란 쓴맛을 보게 되였다. 결혼이 리혼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도 힘들고 지쳤다. 리혼의 아픔은 나에게 인생의 십자가에서 마주하게 된 첫번째 고난이였다. 우울해지고 소극적이였고 리혼을 수치로 생각하면서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버렸다.

하루하루 몰라보게 커가는 딸애의 맑은 눈동자에서 나는 점차 책임감을 의식하게 되였다. 나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하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익혔고 직장생활과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이는 재잘거리며 재롱을 피우고 나도 점차 자신을 찾아가고있었다. 직장에서는 중국어를 쓰지만 신문보도는 우리 글로 쓰면서 이중언어를 사용했다. 집에 와서는 우리 글을 가르치는 엄마로서 딸애에게 책을 읽어주고 동화와 신화를 들려주는 과정에서 삶의 활력을 얻었다. 부모님은 “가정에서는 우리 말로 대화해야 한다.”는 가법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서 우리 말만 사용했다.

내 나이 30대 초반에 전남편이 찾아와 딸애를 위하여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나는 한동안 시간을 가지고 심사숙고한 끝에 새롭게 시작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우리 부부가 서로 반성을 잘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줄로 알았다. 성장통을 크게 앓고난 다음 나는 가정이란 성벽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변하면서 한걸음 더 다가섰다. 련애는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 서로가 조건없이 좋아서 사랑한다지만 결혼은 책임감때문에 함께 가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남독녀로 외롭게 지내온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딸애에게 동생을 만들어주고 더우기는 우리 부부의 마음을 단단히 묶고싶어서 두번째로 아들을 보게 되였다. 하지만 외적인 조건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잡을수가 없었다. 두번째 풍파는 더욱 세차게 일어났다. 아들애가 태여난지 여섯달만에 우리는 또다시 갈라서게 되였다. 년로한 부모님과 두 아이 그리고 나까지 공포에 싸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수가 없었다. 핍박으로 량산에 오른다고 나는 너무도 단호하고 견결하게 두번째 리혼을 선택하였다. 자신의 혈육도 부양 못한다고 포기하면서 수자계산에 열을 올리는 사람한테 부부의 정과 사랑은 사치에 불과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두주먹을 불끈 쥐고 어떠한 고난과 아픔 앞에서라도 부모님과 아들딸을 위하여 씩씩하게 살리라 마음 먹었다. 30대에 애 둘을 데리고 가난의 아픔을 겪게 되였다. 년로하신 부모님도 나에게 의지하고있으니 언제 한번 자신을 위하여 자존심 같은걸 내세울 여유도 없었다. 나는 매일 열심히 일하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아버지 없는 애들이란 말을 듣지 않도록 인성을 가르쳤다. 특히는 어릴 때부터 책임감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다. 나는 누구의 동정이나 받으면서 살고싶지 않아서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부모님과 자식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항상 긍정적으로 살았다. 부모님은 청춘시절에 혼자서 고생한다고 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했던 내가 사람이 되라고 이런 고난을 겪는것이니 괜찮다고 웃으면서 넘길수 있는 여유도 가져보았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고향에서 항상 우등생으로 열심히 공부하던 딸애가 수석으로 중점고중에 진학했다. 부모님은 외손녀를 위하여 삼년동안 매일 기도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똘똘 뭉친 우리 가족은 나에게 자신감과 삶의 용기를 주었다. 딸애와 아들은 공부뿐만아니라 여러 면에서 장기가 많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랑이였다. 비록 힘들지만 항상 든든한 뒤심이 되여주는 가족이 있어 행복했다.

그런데 어느 하루 아침 밥상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중풍에 놀란 아버지마저 중풍을 맞았다. 엄마는 몇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 떴다. 그동안 엄마의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야속해서 울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하지만 80 고령의 아버지를 모시고 애들 둘을 키워야 하는 처지인지라 내내 슬픔에만 잠겨있을수는 없었다.

나는 직장에서 내부퇴직을 하고 연길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아들을 좀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기 위하여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날 나는 간단한 이사짐을 꾸려가지고 고향을 떠났다. 동네분들과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버지를 모시고 삼대가족이 연길에서 세집살이를 시작했다. 힘들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힘들어하는 아들애를 바라보면서 무능한 자신이 너무도 야속했다. 아들은 때로 얼굴이 퍼렇게 멍들어 오기도 했다. 웬 일인가고 다그쳐물으면 애들이 자신을 거지취급하면서 자기네들 먹다버린 간식을 먹으라고 한다며 서러움을 하소연했다. 나는 아들애에게 가난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감과 용기를 키워주기 위해 아들애의 손목을 잡고 도서관과 서점에 자주 드나들었다. 네가 우수하면 아이들이 네옆에 모인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아들애는 점차 자신이 가지고있는것에 감사해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청화대학에 갈것이며 앞으로 명인이 되여 이 사회를 위하여 한몫을 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당차게 일어서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열심히 뛰였다.

팔십 넘은 고령아버지 치매때문에 웃지도 울지도 못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할아버지한테 하는대로 엄마한테 할것이라는 아들애의 유머에 감동을 먹으면서 받아들이는데 습관이 되였다. 외로운 기러기 신세가 된 아버지를 목욕시키고 시중들면서 인생의 끝자락의 쓸쓸함에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가 돌아가고 삼년만에 아버지도 엄마곁에 갔다. 아버지까지 돌아가니 믿고 의지하던 뒤산이 와르르 무너지는듯한 허탈감에 밤잠을 잃었다. 딸애는 나에게 “엄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좋은 딸이였다.”고 하면서 힘을 실어주었다.

나는 학원을 꾸리고 수학과 조선어 과외를 하면서 애들 뒤바라지를 열심히 했다. 차츰차츰 내 생활이 생기를 되찾아갔다. 아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학년에서 우등생으로 각종 경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애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지녔다. 아들은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것이라며 매일 신나게 자신의 꿈을 펼쳐갔다.

그런데 나의 고난은 예서 끝난게 아니였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였다. 아침에 책가방을 메고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겠다던 아들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한순간에 내곁을 떠나갔다. 다시는 아들을 만질수도 안아줄수도 없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수 없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부모가 돌아가면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순서 없는 길목에서 내가 숨 쉬고있는 존재 자체가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세상은 나에게 이토록 혹독한지… 하늘땅이 뒤번져지고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엄마로서 아버지 역할까지 하면서 발버둥치며 너희들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고생고생끝에 인제야 앞이 보이는데 아버지 사랑도 모르고 가난때문에 많은것을 누리지도 못해보고 어찌 그렇게 갈수 있단 말이냐? 내 심장이라도 주고싶은 아들! 그것은 마음이 미쳐버리고 부서지는 아픔 그 이상이였다. “엄마가 넘어가면 나도 일어설수 없어.” 그렇게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던 딸애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에서 나는 또다시 이를 악물고 일어나야 했다.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현실앞에서 나는 많이도 몸부림쳤다. 길가에서도 갑자기 환각이 생기면 나무를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귀가에 들려오는 아들애의 말소리에 가슴이 녹아내리면 주저앉아 실성했다. 나는 여기에서 자신을 놓아버리면 모든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애 학급에서 반장을 잃은 슬픔을 한장한장의 손편지로 써서 보내왔다. 그 편지들을 눈물로 적시며 읽으면서 내가 다음세상에 가서 아들과 만날 때 들려주고싶은 말이 있었다. 더는 울고만 있을수가 없었다.

어느날, 나는 아픔만 가득 안겨준 고향을 떠나 멀리 청도에 왔다. 이곳에서 열심히 과외를 하면서 다시금 일어서려고 발버둥쳤다. 가슴 저미는 아픔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죽기살기로 일만 찾아했다.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여 고아원과 양로원 봉사도 다니고 학원에서 우리 글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하루하루 바쁜 일정으로 살아갔다.

나는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고 생각이란 핸들을 잘 잡기 위하여 앞만 보고 내달리고있다. 여직껏 조선족문화공간이 거의 없으나 다름없던 불모지-산동 청도땅에서 우리 글, 우리 말을 지켜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고향 떠나 타향에서 우리의 현실생활과 밀착된 삶의 실상을 통한 조선족의 정서는 우리 글, 우리 말로만이 표현할수 있다. 중국조선족답게 어렸을 때부터 이중언어를 습득하게 되면 앞으로 글로벌인재로 성장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것이다.

나는 이곳 청도에서 우리 글을 가르치면서 단순한 돈벌이를 떠나서 우리 글, 우리 말 보급에 기여한다는데서 자긍심을 가진다. 청도조선족사회 발전의 발자취를 글로 쓰면서 해안선에서 민족문화의 푸른 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질 앞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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